기억에 길이 남을 결혼기념일

조급, 꽈당, 상처, 핏빛, 달콤이라는 단어로 기억될 날

결혼기념일(結婚記念日. Wedding Anniversary).

부부가 맺어진 날을 축하하는 날이지만, 기념일을 잘 기억 못 하는 남성들에겐 '생존 시험의 날'이기도 합니다.


의학적으로 여자는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가 남자보다 큽니다. 그래서 감정을 토대로 과거를 기억하는 능력이 탁월하니, 그저 당시 상황이나 사실만을 기억하는 남자가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오늘이 바로 결혼 33년 차가 되는 날입니다.

늘 기억을 못 하는 저를 걱정한 아들 녀석이 출근길에 "오늘 결혼기념일이네요"라고 알려 줍니다.

하필이면 오늘 옛 직장 동료들과 저녁 약속이 있는데, 전혀 기억을 못 한 제가 잡았으니 할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있는 내내, 동료들과 식사하는 내내, 잊지 않고 결혼기념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모임이 끝나자마자 빛의 속도로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잊지 않고 지하철역 앞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도 샀습니다. 아직 오늘도 안 지났으니 집에 가서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니 스스로 뿌듯하고 대견하더군요.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척 가벼워 마치 슬로 조깅하듯이 나풀거렸습니다.


순간 눈앞이 번쩍하더니 보도블록이 제 눈앞에 어른거리더군요. 꽈당!

손으로 땅을 집기는 했지만, 뛰던 관성으로 인해 얼굴도 땅에 부딪혔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케이크의 안녕'이었는데 놀라울 정도로 멀쩡합니다. 그제야 손바닥이 까진 것이 보이고, 얼굴 한쪽이 쓰라리고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지네요.


말짱한 케이크를 품에 안고 집에 도착하니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얼굴은 까져서 피가 흐르고 있는데, 한 손에는 달콤 살벌한 케이크를 들고 있으니 제가 생각해도 '웃픈' 상황이네요. 급하게 소독하고 약을 바른 후 여기저기 밴드를 덕지덕지 붙인 채, 케이크에 초를 꽃아 결혼기념일을 축하(?) 했습니다.

결혼기념일 부상.png [영광의 상처-얼굴, 무릎, 손]
image.png [웃픈 결혼기념일과 아이스크림 케이크]

아이스크림 케이크는 정말 시원하고 맛있습니다. 참 기억에 남을 맛입니다.

물론 아내로부터 잔소리도 충분하게 들었고, 아픔과 창피함의 후유증은 한 동안 남을 듯합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빨리 먹는 밥이 체한다'

'서두르면 큰코다친다'

'조급하면 일을 그르친다'


조급함은 안전과 결과에 해롭다는 삶의 지혜를 한번 더 깨닫게 되네요.

덕분에 요즘은 아주 겸손한 자세로 머리 숙여 땅만 보고 걷고 있습니다.

보도블록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저 반성하고 자숙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이번 결혼기념일은 '조급, 꽈당, 상처, 핏빛, 그리고 달콤'이라는 단어로 기억될 것이네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위해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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