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밭담 테마공원과 한국에너지 기술연구원 사이에 있는 작은 만과 해안도로 / 제주밭담 테마공원 안내도>
제주밭담 테마공원과 한국에너지 기술연구원 사이에는 바다가 내륙으로 들어온 작은 만이 있다. 해안도로는 이 만 위를 지난다. 거센 파도가 도로의 나무 난간으로 사정없이 들이쳤다. 부서진 나무 난간의 잔해가 도로 위에서 뒹굴었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파도로 인해 도로는 바닷물로 흥건했다. 차들은 파도가 치면 지나가지 않고 기다렸다 파도가 잠잠해지면 지나갔다. 지나는 차들로 인해 인도로 물보라가 일었다. 건너기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진정되기를 바라며 제주밭담 테마공원에 조성된 밭담을 둘러보았다.
제주밭담은 10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제주 선인들의 노력으로 한 땀 한 땀 쌓아 올려진 농업유산이다. 바람을 걸러내고 토양유실을 막아내며 마소의 농경지 침입을 막아 농작물을 보호한다. 농지의 경계표지 기능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제주밭담은 농업인들의 삶과 지혜 그리고 제주농업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농업유산이다. 제주도 전역에 분포하는 제주밭담은 지역별 토양환경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이루며, 그 길이는 약 2만 2천 km에 이른다.
화강암 돌로 만들어진 다양한 종류의 밭담인 잣담, 정낭, 쉼팡, 잡굽담, 외담, 불턱, 방사탑, 산담, 통시, 환해장성, 작지왓 등이 설명과 함께 조성되어 있었다(자세한 것은 사진으로). 하나하나 읽어보며 지나온 길에서 본 것들을 몇 가지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다시 도로로 나왔을 때 두 명의 여성이 보였다.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올레길 위에 있는 이들 같았다. 그녀들도 만 위에 있는 도로의 상태를 보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그냥 걸어갔다. 파도는 들이치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차가 지날 때 튄 물이 그녀들을 향했다. 그럴 때 그녀들은 등을 보이며 물을 그냥 받아냈다. 그 모습에 나도 용기를 냈다. 물이 튈 것을 대비하여 우산을 펼쳐 빠른 걸음으로 건넜다. 그녀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좀 더 그곳에서 시간을 허비했을지 모른다. 때론 의도하지 않은 사소한 일이 다른 이들에게는 큰 힘을 주기도 한다.
<좌 : 건너기 전, 도로에 물이 많은 부분에 그녀들이 있다. / 우 : 건넌 후>
20코스에서 제주밭담 테마공원부터 시작점인 김녕서포구까지는 거의 해안 길이다. 다만, 해안 길은 해안도로를 따라가지 않는다. 벗어나 있다. 이런 해안 길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덩개해안과 성세기 태역길 그리고 김녕마을의 길이다. 그리고 덩개해안과 김녕해수욕장이 포함된 성세기 태역길은 ‘김녕 지오트레일’로 지정되어 있다(다른 날이면 이곳은 용암에 의해 형성된 다양한 모양의 용암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닷물에 잠긴 이날은 그 흔적을 볼 수 없었다). 그녀들은 사진을 찍으며 걸어서인지 속도가 느렸다. 무척 즐겁고 재미있어하는 느낌이었다. 시간에 쫓겨 여유가 없던 나는 즐기고 있는 그녀들을 앞질러 갔다. 해안도로를 짧게 걸은 후, 도로에서 옆으로 난 길로 빠졌다. 바다로 향한 검은바위투성이로 된 넓은 곳이 있었다. 이곳은 투물러스(2코스 식산봉에 가기 위해 걸었던 내수면에서 언급되었다)라 불리는 지형이었다. 이 해안을 덩개해안이라고 부른다. ‘덩개’에서 ‘덩’은 바위를, ‘개’는 바다를 뜻한다. 즉 ‘덩개’는 바위가 있는 바다란 의미이다.
덩개해안에서 삼별초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환해산성의 흔적이 있는 곳을 지났다. 여전히 바람은 거세었고, 파도도 거칠었다. 저지대는 바닷물이 들어와 물에 잠겼고, 이곳으로 난 길 또한 당연히 바닷물에 지워졌다. 조금 더 걸으니 뒤로 기울어진 안내판에서 ‘두럭산’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바닷가에 산이? 궁금해서 안내판을 읽었다.
김녕리 해안 주변에는 시럽처럼 점성이 낮은 용암으로 형성된 넓은 용암대지가 발달해 있다. 용암이 흐르는 동안 장애물을 만나거나 앞부분이 먼저 식으면 뜨거운 용암 내부가 빵처럼 부풀어 올라 언덕형태의 지형을 만들게 된다 이런 평탄한 용암지대 곳곳에 언덕처럼 솟아있는 지형을 투물러스라고 부른다. 한편 이곳에서는 1년에 딱 한 번, 음력 3월 보름날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특별한 바위를 볼 수 있다. 두럭산이라 불리는 이 바위는 오래전부터 한라산, 청산(성산리), 영주산(성읍), 산방산(화순)과 더불어 제주의 5대 산 중에 하나로 알려져 왔다.
투물러스와 두럭산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되어있었다. 두럭산은 바위였다. 얼마나 크길래 산이라고 불렸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일 년에 한 번이지만 평소에 보였다 해도 파도가 높은 지금은 당연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우: 환해장성 / 좌 : 잠긴 저지대>
우연히 뒤를 돌아보니 그녀들이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계속 걸었다. 걷다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이런 날씨에도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 바다낚시를 하는 두 사람이 멀리서 보였다. 그냥 아찔했다. 옆에서는 파도가 미친 듯이 달려들며 바위에 부딪히고 있는데,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우고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얼마나 미쳐야 저런 용기가 생길까?’, ‘과연 이런 바다 상태에서 물고기가 잡히나?’라는 생각을 하며 그들을 경외스럽게 보았다.
저지대여서 바닷물이 들어와 잠긴 길은 되돌아가 안전한 길로 갔다. 덩개해안이 끝나고 성세기 태역길이 시작되었다. ‘성세기’는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한 작은 성을, ‘태역’은 잔디를 의미한다. 잔디 또는 풀이 많은 곳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부터는 풀들과 모래언덕이 보였다. 성세기 태역길의 저지대 한 곳은 파도가 거의 없었지만 파도의 영향으로 물이 찰 듯 안 찰 듯했다. 나는 그냥 건넜다. 계속 걷다 언덕쯤에서 뒤를 봤다. 그녀들이 그곳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다시 걸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곳은 물에 완전히 잠기지는 않았지만, 길이 돌들로 된 곳이어서 혹시 미끄러져 빠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확인하러 가야 하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는 좀 멀리 와 있었다. 그녀들은 안전한 길을 찾아 되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벌써 건넜으나 내 시야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수도 있다. 또는 사진을 찍기 위해 풍경이 좋은 곳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다. 그때 나는 되돌아갈 여유가 없었다. 당시 시간은 오후 2시 10분쯤이고 20코스도 끝내지 않았다. 19코스도 걸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도 되지 않을 괜찮은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별일 없겠지 하고 걸었다.
<성세기 태역길과 지워진 올레길 - 깃발만 날리고 있다>
대륙붕에 있던 모래가 해풍에 실려 용암대지 위에 쌓여 만들어진 모래언덕인 사구에서도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정말 다시 가야 하나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멀리 왔다. 이후 이번 올레 내내 그리고 서울에 와서까지 계속 그녀들이 맘에 걸렸다. 그래서 숙소와 올레길에서 쉴 때마다 인터넷에서 올레 사고에 대해 검색했다. 아직까진 사고 소식이 없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찜찜함은 여전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서 확인했다면 이런 맘은 없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면서 카뮈의 전락이라는 소설도 떠올랐다. 그녀들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빈다.
<모래언덕>
김녕해수욕장의 모래는 바람에 실려 도로를 덮고 있었다. 도로의 모래는 다시 바람에 날려 다른 곳으로 낮게 깔리며 날아갔다. 해변엔 당연히 사람들은 없었다. 김녕마을에 들어섰으나 마을의 외곽에 있는 해안 길로 올레는 나 있었다. 여전히 파도와 바람은 거셌다. 길 여기저기에 바람에 휩쓸려 날아온 쓰레기와 고기잡이 도구들이 잔해처럼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등대인 도대와 지금은 바닷물에 잠긴 밧줄구조나 치약구조와 같은 용암의 흔적이 있는 조간대를 지났다. 철사로 엮어 만든 벽화에 눈길이 갔다. 물질 나가는 해녀와 물안경을 들고 울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소녀는 물질을 배우고 싶은데 엄마가 배우지 못해서 우는 것인지 아니면 물질을 배우고 싶지 않아서 울고 있는 알지 못하겠다. 다만 엄마의 눈 감은 표정으로 봐서는 따라오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드디어 김녕서포구에 도착했다. 스탬프를 찍고 잠시 쉬며 물을 마셨다. 오후 2시 50분이었다. 그런데 오늘 19코스를 완주할 수 있을까?
(2024. 10. 20)
(계엄, 계엄해제, 탄핵표결, 탄핵부결 등을 겪으며 분노에 글 한 줄도 쓸 수 없었습니다. 오늘 간신히 써봅니다. 글이 다소 거칠 수 있습니다. 너그러이 읽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