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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름 Jan 07. 2024

'무죄 아니면 사형' 백년전 천황에 폭탄 던진 그의 말

하루한권독후감 20240105 <살신성인의 길을 간 의열투쟁가, 김지섭>

[20240105] 김용달, <살신성인의 길을 간 의열투쟁가, 김지섭>, 역사공간, 2017.


지난 5일은 김지섭 의사가 천황이 사는 궁성을 향해 폭탄을 투척한 지 꼭 100년째 되는 날이었다. 100년이라는 숫자에 관련해서 뭐라도 하나 읽어야 하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김지섭 의사에 대한 책은 두 권밖에 없었다.


현재 17일까지는 병원 밖을 못 나가는 신세인데 다행히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기획하고 김 의사에 대한 논문을 낸 김용달 교수가 쓴 <살신성인의 길을 간 의열투쟁가, 김지섭>이 전자책으로 나와 있어서 곧바로 구매해 읽을 수 있었다.


먼저 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1924년 1월 5일 궁성으로 돌아가 보자. 41세의 김지섭은 저녁 7시경 대추형 폭탄 3개를 양복 주머니에 든 채 궁성 정문 앞으로 다가갔다. 일경의 불심검문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세 개 모두 폭발하지 않았다. 이후 김지섭은 일경과의 격투 끝에 붙잡혔다.


당시 일본 <시사신보>는 폭탄이 불발한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다. 처음 일경의 불심검문 당시 던진 폭탄은 오래 지하에 보존해 두었기에 습기로 인한 불발이었고 이후 연달아 투척한 두 발은 첫 폭탄의 불발로 급박한 나머지 안전핀을 뽑지 못하고 던졌기에 불발이었다. 김지섭은 옥중에서 이를 두고 "뜻 있어도 무능하니 단지 죽을 뿐"이라며 "원컨대 훗날 도쿄로 건너오는 의사들이여 내가 한 일을 거울삼아 그대는 공을 이루라"는 시를 남기며 자책한다.


한편 김지섭이 처음 폭탄을 투척하기로 목표한 바는 천황의 궁성이 아니었다. 김지섭 스스로의 진술이 담겨져 있는 「예심종결결정」에 따르면 김지섭은 본디 일본 제국의회를 목표로 삼았으나 의회가 휴회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제서야 도쿄 지도를 사들고 궁성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김지섭의 본래 목표 대상은 제국의회와 거기에 참석한 정부 요인들이었으나 휴회 소식에 천황으로 급변한 것이란 얘기다.


이처럼 우연에 따라 변경된 대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김지섭의 투척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첫 번째로 천황을 향해 타격을 시도한 셈이 됐다. 김용달은 이를 두고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나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서 볼 수 있듯 천황의 뜻은 그렇지 않으나 이토 히로부미나 군부 수뇌가 침략을 강행했다는 "불철저한 반침략의식은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조선혁명선언」은 1923년 신채호가 의열단의 요청에 의해 작성한 문건으로 의열단의 '7가살'과 '5파괴'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천황을 "암살·파괴·폭동의 목적물"로 삼았다)에서 극복되었고, 김지섭이 실천적으로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17쪽·이하 전자책 기준)"고 평했다. 더 나아가 김용달은 "그 결과 1932년 1월 8일 일왕을 저격한 이봉창 의거가 가능했던 것"이라며 김지섭의 의거의 역사적 의의를 매우 고평가한다.


그렇다면 제국의회의 정부요인이든 천황이든 김지섭이 폭탄을 투척한 동기와 목적은 무엇인가. 「예심종결결정」에서 일제는 국내의 암살·파괴 공작이 실패한 것에 대한 유감으로 암살을 통한 조선독립의 기운을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했다.


반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은 김지섭의 동기에 대해 "이전에 우리에게 행한 종종 부도의 행동에 대한 보복은 그만두고라도 작추 적지에서 진재가 있슬 때에 왜노가 무고히 참살한 기천의 아동포의 여혼을 위로하며 그 원수를 보복하기 위하야 저 왜노가 가장 신성하다 하는 궁정을 파괴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작추란 1924년 기준으로 작년 가을이란 의미로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뒤 유언비어로 인해 많은 재일조선인들이 학살당했다. 즉 관동대지진 당시의 학살 보복이 일차적인 동기라고 설명한 것이다.


또한 「독립신문」은 "피(일본) 5천만 인이 신이 소거하는 곳이라 하는 궁성을 파괴하겠다""궁성을 파괴치 못하면 저 민중의 대표기관이라고 칭하는 국회를 파괴하려고 생각하노라"라고 보도하면서 김지섭의 본래 목표가 제국의회가 아닌 궁성이었다고 설명했다.


김용달은 이러한 보도에 대해 김지섭이 제국의회가 본래 목표였다고 거짓진술을 할 이유가 없는 만큼 궁성이 본래 목표였다는 보도는 김지섭의 의거를 더욱 부각시키고 선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서도 의거의 동기에 대해서는 "광동대지진 당시 일제의 한인 동포 학살이 주된 것이고, 부수적으로는 연이어 실패한 의열단의 국내 암살·파괴 공작을 만회하기 위한 것(20쪽)"이라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김지섭은 자신의 목숨을 의열투쟁에 바치게 된 것일까. 김지섭은 안동 풍산김씨 사람으로 안동의 풍산김씨 집성촌인 오미마을에서 태어났다. 안동에는 가일마을, 오미마을 등 여러 집성촌이 있는데 이들 마을에서 매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김지섭도 그중 하나였다.


근대식 교육을 받고 1909년 대한제국 재판소 번역관 시험에 합격한 김지섭은 이해 11월부터 금산구재판소에서 통역생 겸 서기로 근무한다. 당시 금산군수는 홍범식으로 <임꺽정>으로 유명한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였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에 홍범식은 순국자결한다. 이때 홍범식은 자신의 유서를 평소 믿고 아꼈던 김지섭에게 맡겼고 김지섭은 이를 장남인 벽초에게 전달했다. 이런 인연으로 벽초는 광복 후 의열단 동지들이 김지섭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다시 치를 때 장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1913년 1월 김지섭도 재판소에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독립운동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했다. 그러다 기미독립항쟁(흔히 말하는 3·1운동)이 발발하자 중국으로 망명,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해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노농계급의 주도 하에 사회혁명을 통해 계급과 민족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고 했던 반면 김지섭은 고려공산당과는 노선이 다른, 암살·파괴·폭동을 통한 민중직접혁명으로 민족 해방을 이룩하려는 의열단에도 가입해 계급투쟁보다는 의열투쟁에 투신했다. 이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공산당 가입은 사상적 이념에 기반해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측면이 컸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사실로 독립운동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의열단 가입 후 김지섭은 국내의 암살·파괴 공작을 실행하고 군자금 모집을 주도했다. 허나 이는 밀정의 밀고와 일경의 체포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이를 만회하기 위한 계획 겸 관동대지진 당시 죽은 조선인들의 원한을 달래기 위해 국내가 아닌 일본에서의 의열투쟁을 택한 것이다.


궁성 투척 의거가 실패로 돌아가고 법정에 선 김지섭은 "6년 전의 조선독립운동(기미독립항쟁)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이나 적에게 잡힌 나로서는 결코 항복은 아니 하겠다. 정의를 생각하거든 방면할 것이요 그렇지 않거든 사형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조선일보>는 보도했다. 이에 <조선일보는> "검사의 일본혼을 비웃고 조선 민족성과 조선혼을 부르짖고 "적의 (사형)구형은 당연하다"하고 웃으며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이었다(62쪽)"고 김지섭을 묘사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묘사가 식민지 조선의 신문에서 가능했던 것도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맞물린 문화통치의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무죄가 아니면 사형을 달라는 김지섭의 바람과 달리 판결은 무기징역형이 내려졌다. 이는 일본 재판부가 김지섭의 의거를 천황을 향한 반역으로서의 대역죄가 아닌 폭탄 소유, 강도 등 고의적으로 그 범죄의 강도를 낮추어 판결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김지섭은 1928년 2월 복무 도중 갑자기 순국했다. 형무소 측은 뇌일혈이라고 했지만 후세 다츠지 변호사의 도움으로 부검 결과 일본 의사조차 "뇌일혈은 분명한데 기관지 출혈의 장소와 그 모양이 통례와는 다를 뿐 아니라 거의 보지 못한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형무소는 김지섭을 강제로 화장했고 그의 죽음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게 됐다.


책 마지막에는 <동아일보>가 3편으로 연이어 보도했던 「김지섭 옥중기」가 수록돼있다. 이 중 김지섭이 폭발물 취체 벌칙·강도죄·선박 침입 등 재판부가 김지섭의 범죄 행위로 지목한 것에 대해 반박한 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 김지섭의 대범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생각한다.


"이상의 여러 가지 죄라는 조목이 일본 국법에 비추어보더라도 똑똑 따져 어느 법률 어느 조에 들어가 맞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뭉치려 동서고금의 실례에 의하여 한 반역사건으로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한다. 이에 따라 이 처분 방법으로도 역시 동서고금의 실례에 따라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니, 이를 설명하면 하나는 무조건 석방의 관대한 처분이던지, 그렇지 않으면 이렇다 저렇다 귀찮은 재판 수속을 밟지 않고 교수대에 올려놓음이 좋을 것이다(78쪽)"


한편 김용달은 이 책에서 의열투쟁에 대해 "의사와 열사의 과감하고도 자기희생적인 행동"이라고 정의하면서 의사와 열사에 대해서 각각 "성패에 관계없이 목숨을 내걸고 거사를 결행하거나 결행하려다 희생된 이", "강력한 항의의 뜻이나 의분을 자결 또는 그에 준하는 행동으로 내보인 이(23쪽)"라고 정의한다. 이런 차원에서 김용달은 순국자결 역시 열사로서 의열투쟁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현재 국가보훈부 누리집에는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와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토대로 독립유공자 공적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보훈부는 자체적으로 독립유공자의 운동계열을 의병·임시정부·3.1 운동 등 17개로 분류하고 있고 여기에는 의열투쟁도 포함돼 있다.



그런데 정작 의열투쟁에 속한 이들조차 의열투쟁으로 포함돼 있지 않아 보인다. 위와 같이 김지섭의 경우에도 운동계열에 '중국방면'으로 분류돼 있다그가 중국 등지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의열단에 가입해 국내외에서 의열투쟁에 목숨을 바쳤던 것을 생각하면 왜 그가 의열투쟁으로 분류가 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또한 책에서 나온 금산군수 홍범식과 같이 순국자결한 인물에 대해서도 국가보훈부는 위와 같이 '계몽운동'이라고 분류하고 있다죽음으로써 민족의 항일의식을 계몽시켰다는 의미로 선해할 수는 있으나 대중이 계몽운동으로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지 않은가홍범식뿐만 아니라 민영환황현 등 대중적으로 유명한 순국자결 인물들 또한 모두 계몽운동으로 분류돼 있다이 역시 김용달의 주장대로 의열투쟁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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