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능력에의 도취
화용학 수업 기말보고서
화용학 기말보고서를 쓰며 나의 능력에 조금 즐거워한다. 화용학 기말보고서의 주제는 ‘대만젊은이들의 일상대화 중의 중국어와 영어 간의 언어코드전환(Code-switching)에 대한 연구’이다.
대만 유튜브 영상 <這群人TOP> 수십 편을 듣고, 영어로의 코드전환이 일어나는 대화를 수집한다. 그리고 '언어순응론'의 관점에서 언어전환의 동기를 분석한다. 거기서 끝나도 좋았을 것을, 나는 어째 보고서 내용이 부족할까 싶어, 아니 더 솔직히는 굉장히 노력해서 쓴 것처럼 보여서, A+를 받기 위해 설문조사를 하나 추가한다. 물어보는 것은 크게 보면 고작 ‘언어전환하는 동기가 뭐야?’, ‘언어전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어?’의 두 문제가 전부지만 그걸 묻기 위해 자잘한 문항을 22개나 설계했다. 고생한 것처럼 보여야 한다.
여기까지는 별로 대단할 것이 없다. 시간만 들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과정이다. 나 스스로도 내가 기특하게 생각되는 부분은 바로 지금 이야기할 부분이다. 나는 설문조사를 받아보기도 전에 어떤 대답이 나올지 예상해서, 미리 보고서를 거의 완성했다!!! 월요일에 설문조사를 돌리고, 결과를 받아, 통계 수치만 적어 넣으면 된다. 결과가 내 예상과 다르면 다시 써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럴 리가! 나는 설문조사 결과를 내 의도대로 얻도록 문항 순서며, 단어선택에 좀 유의를 했다. (연구 윤리 관점에서 보면 이런 짓은 비난받는다.)
맨 처음에는 태도조사니까 남들 다 하는 대로 리커드 5점 척도로 쓸까 했다. 보고서에 설문결과를 어떻게 서술할지 생각하다가, 내가 통계에 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고 ‘동의해요’, ‘동의하지 않아요’의 두 개의 선택항만 두기로 한다. 그러면, 나는 그냥 설문조사 결과를 가지고 몇 퍼센트의 사람들이 이 질문에 동의하고, 몇 퍼센트의 사람들이 반대했는지만 서술하면 그냥 간단하게 끝나는 것이다.
물론 거기다가 종합 분석 한 문장쯤 붙여줘야 한다. 이 결과들을 보니 말이죠, (1) 대만 젊은이들이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이 편리하고 또 소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습관적으로 그리고 주동적으로 쓰고 있어요. (2) 대만민난어(臺灣閩南語)로 언어전환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이 더 세련되어 보이고 재미있다고 느끼더라고요. (3) 하지만, 모국어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보편적 사용에 찬성하는 입장은 아닌 것으로 나타났어요, 등등.
사(謝) 교수가 그랬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보면 자기 논문이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엉망진창인걸 발견하게 되는데, 쓸 당시에는 자기의 연구 능력에 감탄하면서 쓰게 된다고. 내가 좀 이 경지다. 기말 보고서를 막 시작할 때는 막막하다가 일단 방향을 잡으니, 어디서 그렇게 흘러나오는지 나도 모르게 문장들이 술술 굴러 나오는 것이다. ‘나, 논문 쓰는 게 너무 쉬워! 어떡해~.’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사실 고백을 하자면, 논문을 막 시작할 때 주제도 잡지 못해 절절매면서 방황하던 몇 날 며칠의 고뇌를 아주 하얗게 잊어버리기 때문에 오늘의 즐거움이 가능한 것이다.
문법 수업 기말보고서
돌아서서 문법 수업의 기말보고서를 시작한다. 28일까지만 해도 어떤 주제로 기말보고서를 쓸 것인지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다 1월 3일까지로 정해진 제출일까지 다 써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초초해지는 것이다.
원래 계획은 이랬다. 중간발표수업 때 사용한 주제를 그대로 사용하면, 참고문헌 탐구 부분까지는 이미 해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뭘 조금만 더 덧붙이자.
중간발표수업 때 맡은 주제는 피(被) 자가 들어간 피동문이었다. 그래서 그 주제의 연장으로 중국인과 한국인의 피동문 사용을 화용학적으로 접근해보려고 했다. 그러니까, 중국인과 한국인은 뭘 표현하기 위해 피동문을 쓰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피동문은 '주어가 남에 의해 어떤 행동을 당하다'를 표현하기 위해 쓴다고 흔히들 알고 있지만, 능동문의 목적어를 강조하거나 책임을 회피할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게 피동문에 대한 화용학적 접근이다.
한국어판과 중국어판 <어린 왕자>에서 피동문을 찾아보기로 정했다. 한국어 피동문에는 이히리기 같은 사동 접사가 있고, 중국어 피동문에는 피(被)라는 표지가 있으니,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한국어판 <어린 왕자>에서는 한 페이지에만 해도 피동표현이 어찌나 많아서 기록하기가 다 귀찮을 정도였고, 중국어판에는 피(被) 자가 들어간 피동문이 겨우 손에 꼽힐 정도로 밖에 안 찾아졌다. 아, 이래선 분석이고 뭐고 안 되겠다 싶은 것이다.
급히 주제를 바꾸기로 맘먹는다. 천(陳) 교수는 내 중간발표를 들었을 때, 중국어 보어가 한국어로 어떻게 대응되는지, 즉 어떤 경우에 부사로 번역되고, 어떤 경우에 동사로 번역되는지를 연구하면 아주 가치가 있을 거라고 몇 번은 이야기했다. 이걸 주제로 잡으면 영 엉뚱한 성적은 주지 않겠지 싶은 것이다. 교수님이 쓸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렇게 추천했으니까.
그리고 이 주제로 선행연구가 있나 하고 찾아본다. 완전 운이 좋았다. 중국 쪽 논문 찾는 사이트 CNKI에서 교수가 말했던 딱 그 방향대로 쓰인 두 페이짜리 논문을 찾았다! 내가 쓰려는 내용이 콤펙트 하게 딱 적혀있었다. 나는 그 논문의 결론의 틀을 가지고, 예문을 조금 곁들어 내 것처럼 만들어내면 되겠는 것이다.
어떤 자료를 가지고 분석하느냐가 중요한데, 나는 내 능력으로 중국어 보어 문장을 찾아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래 중국어 보어 관련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다 봤다 하는 문법책을 빌려, 이미 저자가 보어 종류별로 잘 나눠서 예를 들어놓은 예문을 이용하는 트릭을 쓰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났더니, 그것도 하나의 올바른 방법인 것 같은 것이다. 그리고는 아주 그럴듯하게 연구방법을 지어냈다. '이런이런 문법 책 4권에 실린 예시를 분석대상으로 삼는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문법책들은 있을 수 있는 모든 보어의 경우를 체계적으로 잘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어 종류별로 20개씩 총 180개의 예문을 선택한다. 먼저 한국어로 번역하고, 중국어 보어가 한국어와 어떻게 대응되는지 분석한다. 한국어 번역에 있어서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중국어 문장에 최대한 가깝게 직역한다, 둘째는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번역한다.' 나 스스로도 말 지어내는 다소 사기성 있는 능력에 감탄한다. 논문의 연구 방법은, 내가 정말 그렇게 했으면 한 그대로 쓰면 될 일이다. 나는 하지도 않은 방법을 소설 쓰듯이 써 내렸다.
주제를 찾는 것까지 해서, 4일 만에 14페이지의 소논문을 써냈다. 그것도 혼자 생각하기에 와우 정말 잘 썼다 싶은 정도로. 화용학은 며칠간 관련 페이퍼를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이렇게 저렇게 쓰겠다는 틀이 있었는데도 일주일이나 걸렸다. 문법 보고서는 '도대체 문법과 관련된 보고서, 나는 도저히 못쓰겠다'라고 절망했는데 4일 만에 해치운다. 내가 너무 기특하다. 이러다가 소논문 벼락치기 쓰기에 맛을 들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소논문을 처음 써본 것은 신(信) 교수의 수업에서였다. 신교수는 논문의 방향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고, 4명이서 소논문 하나를 써내도록 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걸 쓰느라 진땀을 뺐다. 한 달을 넘게 투자했던 것 같다. 석사졸업논문을 한편 쓴 후로는 열몇 페이지의 소논문 정도는 이제 조금 편하게 느껴진다.
이 소논문 둘 다 학술토론회에 투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졸업을 하려면 학술토론회에서 소논문 2편 이상을 반드시 발표해야 한다.) 박사 첫 학기에 이미 투고할 만한 소논문 두 편을 다 장만해 놓다니! 나, 너무 위대한 것 같다. 투고를 하고 정말 통과라도 하면 나는 아주 기뻐 죽을 것이다. 나, 너무 똑똑해진 것 같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