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아청소년 건강검진 (Well Child Visit) 16년 차
미국 소아청소년 인구에서 가장 큰 사망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지난 몇십 년간 교통사고가 1위를 지켜왔지만, 2020년에 순위가 뒤바뀌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총기사고가 교통사고를 제치고 소아청소년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한 것이죠 [1]. 물론 예전에 비해 교통사고가 많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총기사고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미국 가정의 3분의 1이나 총을 소유하고 있고, 어떤 주는 총기 구매를 할 때 신원 확인도 하지 않는다고 하니, 너무 쉽게 총기가 미국 청소년 손에 쥐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총기에 의한 사고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집니다. 2019년 기준 0-19세 사이 사망자 수의 순서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
타살 – 2023명 (15-19세 1754명)
자살 – 1167명 (15-19세 995명)
비의도성 사고 – 117명 (15-19세 66명)
당연한 이야기지만, 총기사고의 대부분은 소아가 아닌 청소년에서 일어납니다 (다만 총기로 인한 비의도성 사고는 예외인데, 주로 가족끼리 사냥을 나갈 때 일어난다고 하네요). 그래서 소아청소년 건강검진에 오는 환자의 나이가 15살이 넘어가면 슬슬 총기사고 예방에 대한 안전교육 이야기를 꺼내보게 됩니다.
제가 예전에 있던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어린이병원은 흑인이 다수인 지역에 위치해 있었는데요. 미국 소아청소년 총기사고 중 흑인의 사망률이 백인에 비해 5배나 높습니다 [2]. 그러다 보니 신시내티에선 특히나 총기사고 예방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요, 저희 전공의들이 환자의 정기검진을 할 때마다 총기사고 예방의 기본 원칙, 즉 총알을 총에서 분리해 놓고, 총에 안전장치를 채우고 금고에 잠가두는 것을 부모와 환자에게 교육할 것을 강조받았지요. 이런 안전수칙을 지킬 경우 총기로 인한 자살이나 비의도성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70% 이상 줄인다고 하네요.
다만 위에 언급했던 것과 같이 총기사고 사망건수의 다수는 자살이나 비의도성 사고가 아닌 타살인데, 이런 안전교육을 통해 타살의 건수가 줄지는 의문입니다. 결국 소아과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으로는 부족하고, 총기 판매와 사용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총기사고에 인한 죽음이 줄어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미국은 총기소유가 헌법으로 보호되는 나라이고, National Rifle Association(NRA)라고 불리는 강력한 총기 로비 단체가 있어 미국에서 총기가 없어지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현실 안에서 최대한 변화를 이끌어 내자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에서 소아청소년 사망원인 1위였던 교통사고를 새로운 기술과 정책을 통해 사망자 수를 감소시킨 사례를 벤치마킹 하자는 것입니다 [1]. 그동안 교통사고의 감소는 자동차 기술의 발전, 즉 자동브레이크나 레인어시스트, 후방 카메라, 에어백 등을 통해 많은 부분 가능했는데요. 이처럼 총기에도 창의적인 기술을 적용해 총기를 정식으로 구매한 어른만이 작동할 수 있는 "스마트 총"을 만들면 청소년의 총기사고를 방지할 수 있지 않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총기 제조사에 대한 총기사고 면책 법률이 약화되거나 없어져야 비로소 총기 제조사들의 총기 안전장치 개발을 유도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동안 미국과 한국의 소아 및 청소년이 자라는 환경을 비교해 오며 미국의 장점을 부각한 적이 많습니다. 다만 총기사고, 그리고 더 넓은 개념인 타살에 대해서는 한국이 미국을 정말 닮지 않았으면 합니다. 총기사고가 대부분인 미국의 청소년 (15-19세) 연간 타살 건수는 총 1,877명으로 한국의 8명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습니다 [2, 3]. 그래도 한국은 청소년 자살률이 더 높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한국과 미국의 청소년 자살률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은 10만 명 당 11.1명, 미국은 10.5명). 한국 청소년의 총기사고와 타살이 없다시피 한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미국에선 당연한 것이 아닌 것이죠. 한국에 주어진 이런 환경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한 번씩 상기하고, 이런 환경을 오랜 기간 동안 지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image credit: Pixabay - stevepb
references:
1. Lee LK, Douglas K, Hemenway D. Crossing lines—a change in the leading cause of death among US children.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2022 Apr 21;386(16):1485-7.
2. Nelson Textbook of Pediatrics. 22e.
3. 사망원인(104항목)/성/연령(5세)별 사망자수, 사망률. 통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