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아청소년 건강검진(Well Child Visit) 17-21년 차
미국 소아과에선 환자를 21세까지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청소년기를 10세에서 21세까지로 보기 때문이죠. 다만 환자가 어릴 때에는 매년 발달단계에 따라 해 줄 상담과 치료가 있지만, 후기 청소년기(18-21세)로 들어가면 이제 성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발단단계에 따라 해 줄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이전에 다뤘던 정신건강, 성 건강, 물질남용, 영양 등 기본적인 청소년기 상담내용 및 안전교육을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는 느낌으로 검진을 진행합니다. 또한 청소년기에 흔한 만성질환인 비만과 우울증, ADHD 등을 앓고 있는 환자면 잘 관리가 되고 있는지 평가하고 치료하죠.
17세 이후부터는 이제 검진을 소아과가 아닌 내과나 가정의학과에서 받을 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미국에선 18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입학하면 부모로부터 독립해 떨어져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마지막으로 환자를 볼 수 있는 기회가 17세 검진일 수도 있죠. 이젠 부모가 아니라 환자 본인이 스스로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질환과 복용하고 있는 약에 대한 교육을 확실히 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병원과 의사에게 미래에 진료를 받을지 물어보죠.
이런 전환 과정은 장애나 중증도가 높은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는 환자일수록 더욱 중요합니다. 발달장애나 뇌전증, 소아암 환자가 이런 경우에 해당하죠. 또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미국에서는 비교적 흔한 만성질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백인에서 자주 보이는 낭성섬유증(Cystic fibrosis)라고 하는 질환인데 백인 3500명 중 1명 꼴로 발견된다고 합니다. 몸의 모든 점액이 끈적해지는 질환이라 이곳저곳에 다 문제가 생기고 대표적으로 반복적인 폐렴과 1형 당뇨가 생깁니다. 원래는 평균수명이 30세였지만, 신약개발로 인해이제는 50세까지 증가한 의학발전의 성공신화 중 하나이죠. 약을 매일 꾸준히 먹지 않으면 바로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면밀한 관리가 필요한 병입니다.
낭성섬유증 이외에 한국에서 보기 힘든 미국의 질환으로 흑인에게서 자주 일어나는 유전병인 낫 모양 적혈구 증후군(sickel cell disease, SCD)이 있습니다. 흑인 400명 중 1명에게서 발견된다고 하니 낭성섬유증보다 훨씬 흔한 질병이죠. 이 유전자가 있으면 말라리아가 생겼을 때 생존율이 증가하기 때문에 아프리카같이 말라리아가 만연한 지역에서 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남고 후손에게 유존자를 전파한, 진화생물학의 흥미로운 예시입니다. SCD 환자는 대부분 비장이 기능을 일어 감염에 취약하기 때문에 예방접종도 더 자주 맞아야 하고, 비정상적인 적혈구 모양으로 인해 혈관이 갑자기 막혀 엄청난 통증을 경험하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는 약을 꾸준히 먹어주어야 합니다.
이런 만성질환이 있는 환자의 치료는 호흡기내과나 혈액내과 같은 세부분과 전문의가 담당합니다. 그러나 질병 자체가 복잡해 환자가 질병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고 제대로 관리를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세부분과에서 들은 내용을 잘 숙지하고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고 환자 케어의 빈 부분을 채워주며 진료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소아과나 내과 주치의의 역할입니다. 또한 환자가 여러 세부분과를 봐야 하는 질환이 있는데, 한 분과의 전문의가 다른 분과에서는 환자가 어떻게 관리받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주치의가 중심을 잡아주어 이런 다양한 분과의 진료를 정리해서 빠진 부분을 채워주게 됩니다.
이처럼 질 높은 의료를 위해서는 환자를 다른 의사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는 주치의가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통 소아과나, 내과, 가정의학과, 산부인과 의사가 주치의를 맡게 되는데요, 미국에선 정형외과나 안과 같은 분과 전문의를 보려면 주치의의 승인 없이는 보험이 진료비를 지원해주지 않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주치의 문화가 형성이 돼있습니다 (물론 보험비를 많이 내면 보다 자유롭게 진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하튼 미국에서는 모든 진료의 첫 단계가 대부분 주치의에서부터 시작되는 만큼 환자도 주치의를 "My pediatrician" 혹은 "My doctor"라고 불러주는데, 의사 입장인 저로서 이렇게 소유격으로 불러주는 것이 왠지 더 친근감이 들어 책임감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 진료의 중심이 되는 주치의가 이제 소아과 의사로부터 내과 의사로 바뀌는 18세-21세 사이는 큰 전환기인 것이죠.
한국에서는 이런 주치의 문화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이런 전환이 체감이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워낙 다양한 전문과 진료를 예약 없이 당일에 받을 수 있고 진료비도 저렴해서 굳이 주치의를 거쳐서 갈 필요가 없는 것인데요. 이처럼 진료의 접근성이 좋은 것은 환자 입장에서 너무나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론 의료 쇼핑으로 인해 계속 진료받는 의사가 바뀌면 진료의 연속성이 없어지고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신뢰관계가 형성되기 어려운 것 같아 아쉬운 면도 있습니다. 과연 미래의 한국 미래가 우수한 진료의 접근성도 유지하며 환자의 건강을 인생 전반에 걸쳐 파악해 줄 수 있는 주치의 문화의 장점도 같이 도입할 수 있을지 기대해 봅니다.
image credit: Pixabay - Pasja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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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서 미국 소아청소년 건강검진 연재를 마칩니다.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미국에서 수련을 받으며 느낀 점들을 계속해서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감사하게도 얼룩소라는 플랫폼을 통해 그동안 연재한 내용을 이북으로 발간할 수 있었는데요, 관심있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구매해 소장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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