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프레임워크 따기 4

세븐 - 굳은 땅에 '피의 비'가 내릴 때

by 무딘

또 실패와 낙방과 좌절의 계절이 돌아왔네요.

올해도 어김없이 낙방의 연속입니다.

재능 있는 분들에게 돌아간 스포트라이트엔 부러움의 박수를, 또 저처럼 '글과 씨름한 시간'을 경험치로 쌓고 있는 분들에겐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꾸역꾸역 무거워진 발을 내디뎌 보겠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명작의 프레임워크를 따보려 합니다.

'양들의 침묵'처럼 구루와 초짜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죠.

사실 한 분야에 정통한 구루와 천둥벌거숭이 초짜의 동고동락을 다룬 이야기는 많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기억하는 것은, 단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강렬한 클라이맥스와 때문일 겁니다.

적대자가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이 심상치 않죠.

자, 오늘 다뤄 볼 작품은 영화 '세븐(seven)'입니다.




오늘도 준비운동으로 3막의 구분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막 : 세계관 설정. 일상을 흔드는 도발적 사건 발생
2-1막 : 도발적 사건을 풀어가며 잠정적 결과(실패)를 맞음
중간점 : 극을 전후반으로 구분하는 극적 변화 발생
2-2막 : 극적 변화를 따라가다 절정으로 이어지는 사건 발생
3막 : 도발적 사건과 연계된 극 전체의 클라이맥스 해결


이에 따라 극을 분석해 보면 우선 1막에선 쏟아붓는 비, 살인 사건으로 상징되는 암울한 도시의 모습이 극의 배경으로 설정됩니다.

그곳에 섬세하지만 세계를 혐오하는 구루 '서머셋'과 겁 없이 이 세계 속으로 뛰어든 천둥벌거숭이 '밀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퇴직하고 한시라도 빨리 이 암울한 도시를 벗어나고픈 서머셋은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영 눈에 거슬리죠.

그러다 극을 움직이는 '도발적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폭식사(死)' 사건이 발생하는 겁니다.

섬세한 구루 서머셋은 사건이 연쇄살인임을 직감하지만 퇴직을 핑계로 한사코 사건 맞기를 거부하죠.

천둥벌거숭이 밀스가 나서 사건을 맞지만, 두 번째 발생한 '변호사 사건' 앞에서 밀스는 흥분하기만 할 뿐 어쩔 줄 몰라합니다.

이 세계의 구루로서 밀스를 외면할 수 없었던 서머셋은, 사건 간의 연쇄고리를 추측, '7대 죄악'이라는 실마리를 밀스에게 남겨주는 것으로 1막이 마무리되죠.


2-1막에선 극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인물 밀스의 아내 트레이시가 등장합니다.

매력적인 그녀는 서머셋과 밀스의 감정적 가교 역할을 하죠.

그녀 덕분에 서머셋은 밀스를 돕기로 결심합니다.

서머셋의 차분한 관찰 덕분에 '변호사 사건'에서 범인의 숨은 메시지를 풀어낸 밀스는, 세 번째 '나태죄'의 희생자를 찾아냅니다.

여기서도 밀스는 만류하는 서머셋을 뿌리치고 '파파라치'와 말싸움을 벌이기까지 합니다.

흥분을 자제하지 못하는 거죠.


영화 세븐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중간점이 다소 늘어진다는 점입니다.

밀스의 아내 트레이시가 구루 서머셋에게 연락해, 태어날 아기와 관련해서 상담을 받는 것으로 중간점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절정에서 서머셋의 감정을 흔들 커다란 포석이긴 하지만 극이 늘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죠.


2-2막에선 서머셋이 역시 섬세한 관찰을 통해 연쇄 살인범이 흘린 실마리를 분석해 내고 범인의 본거지까지 찾아갑니다.

서머셋은 자신의 리듬대로 조심스럽게 범인을 쫒고자 하지만, 개버릇 남 못 준다고 밀스는 흥분해 날 뛰다가 범인한테 죽을 위기까지 맞게 됩니다.

범인의 호의로 목숨을 건진 밀스는 절차도 위반하고 범인의 본거지를 급습, 범인 '존 도우'의 실체를 알게 되지요.

2-1막 끝에서 만났던 파파라치가 바로 존 도우였죠.

여기서 얻은 정보로 4번째 희생자 '매춘녀'와 5번째 희생자 '모델'도 찾아내지만, 범인의 실마리는 아쉽게도 끊기고 맙니다.

2-2막은 무관심이 미덕이 되는 도시를 하시라도 떠나고파 하는 서머셋과, 그건 '당신의 마음이 만든 가짜 세계다'라고 비꼬는 밀스의 술집 대화로 마무리됩니다.


이 극의 진짜 백미 3막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존 도우가 뜻밖에 경찰서에 직접 자수하러 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가 소리를 지를 때까지 아무도 알아채는 못하는, 절정의 무관심이 극의 테마임을 드러내는 장면이었죠.

존 도우는 6번째(6번째, 7번째) 희생자를 보여주겠다며 현장으로 가자고 제안하고, 서머셋은 꿍꿍이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에 응하죠.

물론 흥분한 밀스는 이 와중에도 길길이 날뛰죠.


클라이맥스는 황량한 현장에 도착한 서머셋이 뜻밖에 소포를 받는 장면으로 설정됩니다.

아시다시피 트레이시의 사체 일부였습니다.

소포를 여는 순간, 존 도우의 함정임을 발견한 서머셋은 밀스를 어떻게든 막고자 하지만, 트레이시의 임신 사실을 몰랐던 밀스는 존 도우의 부추김에 결국 그를 죽이고 맙니다.

'시기(존 도우)'와 '분노(밀스)'의 죽음이 완성되는 순간이었죠.


넋을 놓은 채 경찰차에 구금된 밀스를 보며 서머셋은 그를 지키겠다고 다짐합니다.

암울한 세계에서 달아나기보다 그 속에서 희망을 찾겠노라며, '밀스의 의지'를 그가 이어받는 것으로 전체 극은 마무리되죠.




극의 변화를 이끌어 나가고 극을 관통하며 내적, 외적 변화를 겪는 캐릭터를 주인공이라 정의할 때, 세븐의 주인공은 구루 서머셋입니다.


무관심과 냉소가 팽배한 세계 속에서 당장이라도 벗어나고파 했던 서머셋이, 암울한 세계에 희망을 품은 초짜 부부와 또 그들이 겪는 비극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의 희망을 이어가겠노라 마음을 고쳐먹는 스토리인 거죠.

단테의 신곡(7대 죄악)이라는 모티프와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 강렬한 반전이 단단히 굳은 그의 마음을 뒤흔든 것입니다.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굳어버린 마음의 구루가 천둥벌거숭이 초짜의 비극을 함께 겪으며 세상을 향해 다시 마음을 여는 이야기인 것이죠.


하나 더, 극에서 간과하면 안 되는 점은 악역 존 도우의 존재이자 그의 역할입니다.

그는 모티프 자체이자, 모티프를 이끄는 인물이자, 모티프를 통해 '메시지를 던지고 싶어 하는 자'입니다.

그가 있으므로써 비극의 다이내믹은 한층 증폭되죠.

결과적으로 메시지를 완성한다는 점에선 그도 주인공의 특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큰 흐름들을 종합해 극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프레임워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가. 1막

- 극 전체 배경, 세계관을 설정하는 사건 발생

. 세계를 비관하는 노회한 구루와 그 속에서 꿈을 꾸는 천둥벌거숭이 초짜의 등장

. 구루는 이 세계를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원함

- 도발적 사건 : 기존의 세계관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사건 발생

. 구루는 물러서지만 혈기왕성한 초짜가 적극적으로 나섬

- 이어 또 한 건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 발생

. 열의만 넘치지 사건과 세계 앞에서 무력하기만 초짜

. 구루는 경험을 바탕으로 두 사건의 연결성을 분석, 초짜에게 간접적인 도움만을 남김


나. 2-1막

- 초짜와 구루와의 심리적 간극을 좁힐 사건 발생

. 초짜의 심리적 안정감을 좌우하는 인물 또는 사건과의 만남

. 이를 계기로 구루는 초짜를 서포트해주기로 결심

- 기존의 사건들을 차분히 분석 거기서 연관된 제3의 사건을 예측하는 구루

- 세 번째 기이한 사건을 목도하는 두 주인공

.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초짜는 구경꾼들과 충돌하며 흥분

- 중간점 : 초짜의 심리적 안정감을 좌우하는 인물 또는 사건과 더 깊어지는 구루의 관계

. 초짜는 알지 못하는 비밀 공유

다. 2-2막

- 경험과 직관, 또 암울한 세계 속에서 형성한 네트워크를 활용해, 적대자의 모티프를 분석해 내는 구루

. 기이한 사건들을 연결하는 커다란 모티프를 읽어내는 구루

. 이를 통해 적대자의 본거지에 접근

- 적대자의 본거지에서 적대자와 충돌하는 두 주인공

. 신중한 구루와는 달리, 초짜가 어설프게 접근하다가 적대자에게 되려 역습을 당함

- 종적을 감춘 적대자의 본거지에 침입, 적대자가 일으킬 또 다른 사건들 파악

. 사건을 쫓아가지만, 결정적인 실마리를 찾지는 못함

라. 3막

- 갑작스럽게 초짜와 주인공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적대자

. 모티프를 마무리지을 사건을 보여준다고 제안

. 사실 초짜를 먹이 삼기 위한 적대자의 큰 그림

- 적대자를 쫓아갔다가 적대자의 함정에 빠지는 초짜와 구루

. 초짜의 심리적 안정감을 뒤흔들 인물(사건)을 모티프 안으로 끌어들인 적대자

- 결국 적대자의 함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적대자의 모티프를 완성시키는 초짜

- 세계를 떠나지 못하고 무너진 초짜를 지키려 드는 구루


이 프레임워크를 뼈대로 사용할 때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모티브를 무엇으로 할 거냐일 겁니다.

반복해서 사건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그를 통해 적대자가 어떤 사회적 메시지를 던질 수 있어야 하죠.

모티브의 깊이에 따라 극의 무게감이 달라질 테니, 아마도 오래 고민해서 선정해야 할 겁니다.


글을 쓰며 제가 얼핏 생각해 본 모티브는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었습니다.

칸트는 '인간은 시간, 공간과 더불어 양, 성질, 관계, 양상에 해당하는 12가지 필터(범주)를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세상을 결코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죠.


세븐에서 따낸 프레임워크에 칸트의 '12 범주'를 적용하면, 쓸만한 추적극을 쓸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예를 들어 엄청난 재산을 가진 아버지가 곧 죽음을 맞게 될 예정인데요, 그는 유언을 남기겠다며 각지에 흩어져 살던 자식들을 소환합니다.

아버지가 '검은돈'을 모으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이에 염증을 느껴 아버지를 떠난 큰 아들(구루)과, 어떻게든 그의 제국을 물려받고자 혈안이 된 막내 아들(초짜)까지 집으로 모이게 되죠.

그래, 아버지의 유언을 받으려 그의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형제들은 아버지가 납치된 사실을 발견합니다.

납치범은 엄청난 돈을 요구하며 칸트의 12 범주에 해당하는 메시지를 남기죠.

그렇게 납치범의 흘린 메시지를 하나하나 쫓아가며, 결국 납치는 아버지의 자작극이었고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스스로 만든 허상'이라는 아버지의 메시지가 아들들에게 전달되죠.

이때 초짜가 이룬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12 범주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퍼즐이 됩니다.


써놓고 보니 그다지 재미있는 아이디어는 아니다 싶네요.

어디까지나 예에 불과하니, 세븐의 프레임워크가 쓸만하다 싶은 분들은 조금 더 진지하게 모티브를 고민해 보시죠.

버릴 건 버리고, 비틀 건 비틀어 가다보면 나름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올거라 믿습니다.




정리하다 보니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이 프레임워크조차 어딘가에 있는 '원형(Prototype)'을 응용해서 나온 게 아닐까 하는.

뭐 한 명 한 명의 인간조차 따지고 보면 원본의 돌연변이에 불과하니, 그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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