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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스퍼 Jul 14. 2024

<화장품의 색> 엄마 왜 그런 색을 발라?

엄마의 립스틱이 유난히 진한 이유

<화장품의 색> 엄마 왜 그런 색을 발라?

"또 버리는 거 없니?"


우리집에는 한 마리의 하이에나가 산다. 그녀는 나의 화장대를 호시탐탐 노린다. 화장대 주인의 예민한 피부에 안맞는 화장품은 없는지, 혹시나 샀는데 촌스럽다고 마음에 안들어서 버리는 화장품은 없는지 수시로 물어본다. 그러면 화장대 주인은 버리려고 모아둔 화장품을 선심쓰듯 준다. 


"이거, 비타민C 엄청 많이 들어간 좋은 앰플이야. 

자외선 받으면 안좋으니까 낮에는 바르면 안되고, 밤에만 발라."

좋은 화장품은 맞지만, 사실 내 피부에는 너무 자극적이고 따가워서 버릴 요량이였다. 마침 화장품을 필요로 하는 하이에나가 있으니 일석이조라 생각하고 한껏 생색을 내며 비타민C 세럼을 건넨다.


"어어, 고마워! 어머, 향도 너무 좋다. 이거 바르면 기미 없어지는거야?"

버리려고 했던 화장품인지는 알아도 아무튼 새로운 화장품을 받으면 기분이 좋다. 가장 조그만 노력으로 나 자신을 가꿔주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기초 제품은 주로 내 피부에 안맞는 것 위주로 증정(?)했다. 이상하게 얇고 예민한 내 피부와는 다르게 엄마의 피부는 웬만한 자극감 있는 화장품을 발라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뜨겁게 삶은 감자 껍질을 맨손으로 마구 벗겨낼 때부터 의심했던 거 지만, 엄마의 피부에는 뭔가 단단하고 어떠한 외부자극에도 끄떡없는 특수한 피부층이 있는게 분명했다.


"그리고, 엄마들 이런 색 좋아하지? 난 촌스러워서 안쓰는 건데, 쓸래?"

샤넬 팝업스토어에 갔다가 공짜로 받은 립스틱이었다. 처음에는 써볼까 하다가, 이건 악성재고여서 나눠준 색이 분명해. 라고 생각할만큼 촌스럽고 진한 진달래색이였다. 게다가 펄은 어찌나 자글자글 많은지. 안그래도 진한 색이 어울리지 않는 나에게는 먼지쌓인 처박템이 되었고, 화장대 정리를 하다가 휴지통 문앞까지 갔던 친구가 주인을 찾은 것이다.

엄마는 이거 진짜 샤넬이냐며 뛸듯이 좋아했다. 그리고 바로 손거울을 들고 바로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 후 음파음파해본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안어울렸다. 엄마는 나처럼 하얀 피부에 선이 얇은 눈코입으로 진한 색이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뭔가 이상한듯 괜찮은듯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어때? 진하니까 더 또렷해보여서 괜찮나? 전문가인 너가 보기엔 어때?"

회사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면... 팀장님은 피부톤이 어떠셔서, 이런 색보다는 좀 더 밝고 밀키한 색감이 잘어울리세요, 그리고 웬만하면 매트한 립스틱보다는 광택감있는 글로스가 볼륨있어 보일 것 같은데, 이거 한 번 발라보세요, 라고 제품장을 뒤져가며 있는 친절 없는 친절을 베풀었겠지만, 지금은 주말이고 여기는 집이고 엄마는 가족이니까, 적당히 모른 척 하고 싶다.

"어, 좀 진한것 같긴 한데, 뭐. 괜찮네. 아줌마들 이런 색 많이 바르잖아."


우리 집 하이에나는 딸래미가 버린 몇 가지 화장품을 바구니에 담아 들고, 

본인의 화장대로 신난 발걸음을 옮긴다.

"딸이 화장품 회사 다녀서~ 진짜 너무 좋아~"




엊그제는 엄마의 합창단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퇴근 후, 하루종일 일하고 평일 저녁에 어딜 가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아냐고 잔뜩 생색을 내면서도 작은 꽃다발을 사들고 시청역의 작은 성당으로 향한다. 예배당에 들어서자 높은 층고 위로 울려퍼지는 신성한 오르간 소리에 나도 모르게 차분한 마음이 든다. 모태 신앙이지만 지금은 무교로 전향한 내 머릿속이 '신이란 뭘까..'와 같은 질문으로 가득찬 순간,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엄마가 등장했다. '아뿔싸!' 순간 신성한 마음이 사라지고, 엄마의 입술밖에 안 보였다. 맨 뒷자리에서도 보이는 진하고 선명한 진달래색 립스틱. 내가 준 샤넬 립스틱을 바른게 틀림 없었다. "근데, 엄마 입술이 왜 저래?" 언니가 말했고 나는 모른 척 하면서도 죄책감에 마음이 화끈거렸다. 


공연이 끝나고 가까이서 엄마의 얼굴을 보니 그 샤넬 립스틱을 발랐음이 더 분명해졌다. 

"애들아! 어디 앉았었어? 난 너네 계속 찾았는데 못 봤잖아~ 권사님! 우리 딸들이에요. 예쁘죠?"

나는 다급하고 은밀하게 물었다.

"엄마, 오늘 왜 이 색 발랐어? 하얀 드레스면 그냥 연한 핑크색 바르지."

"아, 이거? 너가 준건데, 샤넬! 그 때 너가 예쁘다고 했잖아~ 권사님, 우리 딸이 화장품 연구원이거든요~"

"어 그래~? 어쩐지~ 오늘 진한 색 발랐는데 색이 선명하더라고~"라고 말하는 권사님들 입에도 세상 진한 고추장색, 진달래색이 발려 있었다.



우리 엄마는 원래 화장을 진하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퍼스널 컬러로 따지자면, 봄 라이트정도 되는 연한 화장이 잘 어울리는 여성스럽고 청순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엄마도 립스틱만큼은 화려한 걸 좋아한다. 그리고 주말에 엄마를 따라 간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할머니 권사님들은 다들 진한 립스틱을 칠하고 계신다. 나는 가끔 엄마한테 물어본다. "엄마, 왜 그렇게 촌스러운 색을 발라?"


'화려함'이 과하면 '촌스러워'진다. '화려함'의 반대는 '세련됨'이다. '세련됨'은 과하지 않은 것, 즉 '절제미'를 담고 있다. 패션으로 친다면, 여성스러운 블라우스로 입었을 경우, 하의는 시크한 슬랙스를 매치하는 것. 귀여운 똑단발을 했다면, 볼드한 이어링으로 스타일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 이런 것이 '밸런스'이고, 절제된 '세련됨'이다. 하지만, 엄마들은 이런 세련됨보다는 화려함을 좋아한다. 절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엄마들은 왜 그렇게 화려한 걸 좋아할까?


엄마들은 학교를 다니다가, 일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나서는 누군가의 부인으로,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왔다. 5-60대가 되고 나서야 이제 나를 꾸며볼까 하지만, 결혼 전의 내 모습과는 사뭇 다른 거울 속의 나를 만난다. 노화로 노랗고 칙칙해진 얼굴, 조글조글한 입술 주름과 줄어든 볼륨.. 예전에 바르던 여리여리한 립스틱은 발라도 티도 안 난다. 주름과 기미와 세월의 흔적을 가리다보면 입술색은 점점 더 진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화장대에 앉아 화장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지나가버린 나의 젊음, 아름다운 시절... 그리고 오늘은 앞으로 중에 내가 가장 젊은 날이겠지. 우리 엄마는 요즘 들어 그런 말을 많이 한다. "인생이라는 게 뭔지 아니? 잠깐 와서 즐겁게 놀다 가는 거야."


엄마들은 아름다움을 절제하기에 시간이 없다. 하루하루 최대로 예쁘고 화려하기에도 바쁘고 아까운 시간이다. 그렇게 엄마들은 화려함에 화려함을 더해간다.  설령 젊은 사람들 눈에는 그것이 다소 촌스러워 보일지라도. 누군가의 엄마도, 아내도 아닌 여자인 나를 위해서. 그동안 못했던 모든 아름다움을 나에게 선물한다. 



몇 일 뒤 화장대에 다시 하이에나가 찾아오기 전에, 이번에는 내가 먼저 하이에나의 화장대를 방문했다. 이번에는 낡은 화장품을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엄마의 피부톤에 맞게 구매한 새로운 화장품들을 가져갔다. 내가 화장할 때, 그건 뭐냐며 갖고 싶다고 했던 쿠션, 파랗게 잔흔이 남은 눈썹 과 아이라이너 문신을 가려줄 애쉬 브라운톤의 자연스러운 아이브로우, 밝은 엄마 피부 톤에 어울리는 촉촉한 립스틱과 립글로즈, 이 모든 것을 담을 분홍색 입생로랑 파우치까지.


"이거 다 나 주는거야!? 고마워~ 근데 너처럼 화장하려면 어떻게 하는거야?"

나는 그 자리에서 화장품을 뜯어서 엄마의 얼굴에 직접 화장을 해줬다. 쿠션은 너무 두껍게 바르면 안되니까, 퍼프에 찍은 파운데이션을 뚜껑에 잘 두들겨서 먹인 다음 피부에 펼치듯 발라야해. 엄마 입술은 밝은 톤이라 너무 진한색은 안 어울리니까, 립글로스를 발라서 연한 색으로 볼륨을 주는게 좋아. 그러면 입술 주름도 좀 덜보일거야.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전문가라는 딸의 손에 얼굴을 맡긴 채, 눈을 감고 화장을 받는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몇 년 전보다 늘어버린 주름과 기미, 30대로 훌쩍 들어버린 내 나이만큼 늙어버린 엄마의 얼굴이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주름을 메우고, 기미를 가리고, 생기를 넣는 색을 칠했다. 조금씩 살아나는 엄마의 얼굴에 붓질을 더해갔다.

주름진 눈을 뜨고 거울을 보자 엄마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상에, 화장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역시 전문가!"

나는 그놈의 전문가 소리가 낯간지러워서 아무튼, 그렇게 쓰라고. 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 날 이후, 밖에서 엄마를 만나도 엄마의 입술에는 연하고 부드러운 복숭아빛이 올려져 있었다.

더 이상 무언가를 감추려는 색이 아닌, 그 자체로 빛나고 있는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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