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스퍼 Jul 07. 2024

<프롤로그> 색을 보는 사람들

컬러리스트가 보는 세상


무슨 일 하세요?

한동안 이 질문에 답하기 쉽지 않았다. 백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돌아 돌아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직업은 사람들에게 생소했다.

“컬러리스트예요.”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낯간지러웠다. ’-리스트‘라고 말하는 것이 특별한 척하는 것처럼 보일까 싶어 머뭇거리게 됐다.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 정도로 내 삶을 예술에 걸고 있어야 -리스트라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옷의 색깔을 정해요. “라고 말하면, 상대방의 표정에는 물음표가 세 개 정도 뜬다.

‘그게 뭐지?’ ‘옷의 색깔을 정해?’ ‘일이 그게 다인가?’의 순서가 대부분이었고, 몇몇 사람들은 실제로 그 생각을 나에게 직접 물었다.

“옷에도 그림처럼 3 요소가 있거든요.

형태, 소재, 색감.

저희 회사에선 그걸 분업화하고 있어요. 스타일 디자이너가 옷의 형태를 디자인하고, 소재디자이너가 소재를 정해주면, 저는 마지막으로 색을 입힌답니다. “라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마치고 나면, 그제야 사람들은 이해한다는 표정과 함께 잇따른 질문들을 한다.

아- 그런 직업이 있는지 몰랐다, 그러면 어떤 기준으로 색을 정하는 거냐, 영감을 주로 어디서 받냐, 색깔이라는 건 주관적인데 어떻게 사람들을 설득하냐, 옷의 색만 정하는 거면 너무 일이 적은 것 아니냐는 사려 깊은 걱정(?)까지.


요즘에는 그나마 퍼스널컬러가 유행하면서, ‘컬러리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컬러에 대한 중요성도 수면 위로 많이 올라왔다. 하지만, 퍼스널 컬러는 ’ 색의 세계‘의 아주 일부분이다.

사람의 신체 색을 다루는 퍼스널 컬러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것처럼 상품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제조업에서의 색채 디자이너, 영상의 지배적인 분위기를 보정하는 컬러 그레이더, 주변 환경과 건축물의 용도까지 헤아려야 하는 건물 색채 계획사, 사람의 마음을 치료해 주는 오라소마 컬러 전문가 등 여러 가지 색과 그에 대한 직업이 존재한다.

컬러를 다루는 일은 감각도 물론 중요하지만, 컬러가 적용되는 물성에 대한 파악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패션의 컬러를 다루는 사람은 소재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옷의 색상을 선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코튼은 뿌옇게 염색이 되고, 오간자처럼 쉬어한 소재는 옷을 만들면서 여러 겹이 겹쳐지기 때문에 원하는 것보다 연한 색으로 염색해야 한다. 리넨처럼 오가닉 한 소재는 투톤으로 염색되기 때문에 너무 짙은 회색으로 할 경우 먼지구덩이처럼 지저분하게 보일 수 있어 주의해야 하며, 트위드는 여러 색이 함께 짜이는 소재여서 색의 배합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그 외에도 폴리나 아크릴은 염색이 잘 먹기 때문에 너무 저렴해 보이지 않는 색으로, 캐시미어나 울처럼 고급 소재는 원색도 고급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색이므로 컬렉션의 포인트 컬러를 주로 담당하는 게 좋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한 브랜드의 컬러를 담당할 수 있다. 이런 것은 패션뿐 아니라 다른 업계의 컬러도 마찬가지이다.

자동차의 컬러는 라인의 주 소비층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제네시스와 같은 고가의 라인을 노란색으로 계획하는 컬러디자이너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제네시스의 컬러들은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펄감이 가미된 뉴트럴 톤이 대부분이며, 유색이라 할 수 있는 빨간색도 굉장히 톤다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스포츠카는 왜 원색이 많을까? 웬만한 차 마니아가 아니라면, 일상생활에서 배기음이 ‘부아앙‘ 나는 스포츠카를 몰기란 쉽지 않다. 그 말인즉슨, 스포츠카를 사는 사람들은 차가 2대 이상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스포츠카는 일상생활보다는 특별한 날 기분 내고 싶을 때 몰고 나가는 용 일 것이다. 한 마디로 사치품이고, 사치품에는 사치스러운 색을 적용해 주는 것이 그것을 사주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다.

건축물의 색 같은 경우에는 더욱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은데, 외관 색은 주변 경관의 색을 너무 해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도시마다 법으로 정해져 있다. 우리 아파트가 튀고 싶다고 해서, 산으로 둘러싸인 아파트에 형광색이나 보라색을 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하 주차장과 같은 기능적 공간에는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데, 운전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의 밝기와 진하기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차장 바닥 색을 칠하는 페인트의 명도를 약간 조절하자, 사고율이 현저히 낮아졌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 말인즉슨, 반대로 명도 조절을 했다면 색으로 인해 사고율이 그만큼 높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건축물의 색채는 안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컬러는 이처럼 우리의 일상에 녹아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색을 정하는 사람들은 고려해야 할 요소가 아주 많다. 누군가의 친절한 걱정이 무색할 만큼, 일이 너무 적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업무 강도는 강한 편에 속하고, 보는 것처럼 우아하고 고상한 직업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열려 있는 색에 대한 관심이다. 우리가 대하는 모든 일상이 색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색에 대한 감각을 열어두어야 한다. 표절과 영감의 차이는 같은 업계 인지, 아닌지에 따라 갈린다고 했던가. 패션 컬러리스트는 예술 작품의 색에서 영감을 받고, 화장품 컬러리스트는 푸드 스타일링에서 영감을 받고, 영상 컬러리스트는 건축물의 색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다.  또, 가끔은 보이지 않는 색에서 영감을 받기도 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색, 어떤 도시에서 느껴지는 색, 공기의 색, 감정의 색, 태도의 색… 나는 컬러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이 훈련을 가장 열심히 해왔다. 직업이 '업'이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지금은 어딜 가던지, 누굴 만나던지 색으로 기억되는 것이 많다. 그 사람은 어떤 색의 성격을 지녔지, 그때 그 사람의 감정과 말투는 이런 색이었지, 그 여행지는 무슨 색이었지, 너에게는 지금 무슨 색의 에너지가 필요하지. 이렇게 색으로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고, 차마 보지 못하고 지나갔을 것들을 발견하게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세상에 못생기고 추한 색은 없기 때문이다.


색을 다룬 지 8년째, 나는 이 직업을 갖기 전보다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세상이 다채롭다고 느낄 때가 많다. 사과가 빨갛게 무르익으려면 초록색을 거쳐야 하고, 순백색의 웨딩드레스가 빛나려면 하객들의 배려가 필요하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에 고마움을 갖게 된다. 이런 감각과 시선은 반드시 이 직업을 갖지 않아도 누구나 키워나갈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색을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색으로 기억한 세상과 그것을 보고 기억하는 시선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무채색처럼 단조로운 줄 알았던 내 인생을 찬란하게 물들일 누군가를 위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