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광대함에 관하여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하게 닦인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 주우며 놀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한 미지로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 아이작 뉴턴(Issac Newton)
아이작 뉴턴은 자신의 마지막 글에서 무한에 가까운 세계를 마주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회고했다. 어쩌면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물리학적 성과가 아니라, 진리의 세계가 얼마나 드넓은지, 그리고 이에 가 닿지 못하는 인간의 위치를 아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리학자로서의 탁월함을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세계의 질서를 구성하는 법칙에 자신의 이름을 덧붙여 불리는 것보다 세계의 무한함을 사유하고 이에 상응하여 겸손한 삶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 더 위대해 보일 뿐이다. 이는 사람이 응당 갖추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응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으며 또 사랑을 길어 올렸다. '거대한 진리'는 '광대한 사랑'으로 읽혀 사랑의 무한함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이고, '온전한 미지'는 그 자체로 사랑의 속성이 되어 사랑은 무정형(無定形)인 것이라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랑은 무한하고 그렇기에 사랑은 형태가 없다는 사실을 앞에 두고 속 좁은 결정(結晶)과 같은 자신의 사랑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에 관하여 생각하고 사랑을 하는 사람이 과연 잘난 체할 수 있냐는 것이다. 불가능하다. 사랑 앞에 으스대는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의 그 어떤 단면에도 닿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도 없고 꼭 그래서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 무한한 사랑의 세계 앞에서 다른 것들보다 '더 매끈한' 혹은 '더 예쁜' 것을 발견하는 것, 수많은 돌 중에서 '그 조약돌' 혹은 많고 많은 조개껍데기 중에서 '그 조개껍데기'를 찾는 것, 그리고 그것을 주워 노는 것이야 말로 사랑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계명이다. 그 안에는 꼭 그만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감탄이 있고, 그를 발견하고 선택하며, 살을 맞대고 숨을 건네며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결코 사랑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전부이다. 무한한 사랑을 마주 대하며 추상하는 것은 꼭 이렇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친구여, 우리 오늘도 그렇게 한 번 놀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