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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과 상상: AI가 채울 수 없는 신성한 빈칸

'창발 지능'을 깨우는 법

by 류한석

벽난로 앞에서 졸던 화학자 아우구스트 케쿨레는 꿈속에서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를 통해 그는 벤젠이 고리 구조로 되어 있다는 위대한 발견을 했다. 이 이야기는 데이터의 논리적 귀결이 아닌, 무의식과 상상의 영역에서 길어 올린 직관과 통찰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우구스트 케쿨레는 '유기구조화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벤젠의 고리 구조를 제시한 업적과 더불어, 노벨 화학상 초대부터 5대까지의 수상자 중 그의 제자가 3명이나 포함될 정도로 화학 분야 학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오늘날, 케쿨레의 모든 연구 데이터를 AI에 입력한다면 어떨까? 아마 AI는 수백만 개의 가능한 분자 구조를 순식간에 시뮬레이션하고, 그중 가장 안정적인 형태가 고리 구조일 확률이 높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AI는 빠르고 효율적이다. 하지만 AI는 결코 ‘자기 꼬리를 무는 뱀의 꿈’을 꿀 수 없다. 데이터가 가리키지 않는 미지의 영역으로 도약하는 상상력, 논리를 뛰어넘어 본질을 꿰뚫는 직관의 섬광. 이것은 AI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신성한 빈칸으로 남아있다.


생성 지능을 넘어, 창발 지능으로


우리는 AI의 능력을 ‘생성형(Generative)’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데 익숙하다. 이는 AI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말이다. AI는 기존에 존재하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여, 그럴듯한 패턴과 조합을 ‘생성’해내는 데 탁월하다. 이를 ‘생성 지능(Generative Intelligence)’이라 할 수 있다. 렘브란트의 화풍을 학습해 유사한 그림을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을 분석해 미완성 악장을 이어 붙인다. 경이롭지만, 본질적으로는 과거의 정교한 모방이자 재조합이다.


이에 반해, 인간이 가진 고유한 능력은 ’창발 지능(Originative Intelligence)’이다. 이는 ‘창조하여 발현시키는’ 능력으로, 기존 데이터셋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과 의미를 탄생시키는 힘이다. 세상에 없던 것을 상상하고,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연결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며, 설명할 수 없는 ‘느낌’과 ‘감’에 의존해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용기다. 자기 꼬리를 문 뱀에서 벤젠 구조를 떠올린 케쿨레, 떨어지는 사과에서 만유인력을 직관한 뉴턴이 바로 이 창발 지능의 증인들이다.


생성 지능이 이미 그려진 지도 위에서 가장 빠른 길을 찾는 능력이라면, 창발 지능은 지도 바깥의 신대륙을 꿈꾸고 그려내는 능력이다. AI는 우리를 더 유능한 ‘탐험가’로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이름 붙지 않은 별을 향해 나아가는 ‘몽상가’의 역할은 오롯이 우리 인간의 몫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기술(숏폼, SNS, AI 의존 등)의 소비적 사용으로 인해 이 창발 지능을 잊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창발 지능’을 깨우는 3가지 의식


AI가 생성한 무한한 콘텐츠와 즉각적인 답변의 홍수 속에서, 우리 뇌는 멍하니 생각할 ‘틈’을 잃어버렸다. 직관과 상상은 효율성과 생산성의 반대편에 있는 ‘비움’과 ‘여백’ 속에서 싹튼다. AI 시대에 이 소중한 능력을 지키고 계발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의식(Ritual)’이 필요하다.


의식이란 의도와 의미가 부여된 반복적 행위다. '습관(Habit)'과 '의식(Ritual)'의 차이점은 바로 이 의도성에 있다.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리는 것은 습관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하루의 시작을 다짐하고 사유를 가다듬는다면 그것은 의식이 된다. 평범한 행동을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특별한 순간’으로 바꾸는 마법, 그것이 바로 의식의 본질이다.

의식은 특정 마음 상태로 들어가기 위한 ‘정신적 스위치’로 사용된다. 작가가 글을 쓰기 전 늘 같은 음악을 틀거나, 운동선수가 경기 전 특정 스트레칭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특정 행위를 통해 흩어진 생각을 잠재우고 ‘이제 시작’이라는 신호를 뇌에 보내는 것이다. 이때의 의식은, 일상의 소음과 나를 분리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심리적 방아쇠로 작용한다


1. 의도된 공백 만들기 (The Ritual of Intentional Void)


아리스토텔레스는 ‘빈 공간이 생기면, 자연은 그것을 채우려는 힘을 작용시킨다’고 보았다. 이와 유사하게 창의성은 정신의 빈 공간을 채우려는 본능에서 발현된다. 이를 위해서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실용 팁: 하루 15분, ‘디지털 안식 시간’을 가진다. 스마트폰을 놔두고 산책하거나,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아무 음악도 틀지 않은 채 샤워하는 것이다. 이 무목적의 시간이야말로 무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라 AI가 결코 생성할 수 없는 아이디어를 속삭이는 순간이다. 스티브 잡스가 참선을 위해 명상센터를 찾고, 빌 게이츠가 ‘생각 주간(Think Week)’을 가졌던 이유는 바로 이 ‘의도된 공백’의 힘을 알았기 때문이다.


2. 지적 경계 허물기 (The Ritual of Cross-Pollination)


가장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종종 서로 전혀 다른 분야의 지식이 충돌하는 경계면에서 태어난다. 우리는 흔히 전문성을 '깊이'로만 이해한다. 하나의 분야를 파고들수록 더 전문가가 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진정한 돌파구는 이 깊은 우물과 저 깊은 우물 사이에 다리를 놓을 때 나타난다. 건축가가 생물학을 공부하면 자연의 구조를 모방한 건축물이 탄생하고, 의사가 공학을 이해하면 혁신적인 의료기기가 만들어진다.


실용 팁: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가장 거리가 먼 책을 한 권 읽는다. 물리학자가 시집을 읽고, 마케터가 양자역학 입문서를 읽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사유의 구조와 만나 자기 뇌에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드는 ‘지적 이종교배’의 경험 그 자체다. 그런 경험이 쌓일 때, AI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없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관점을 갖게 된다.


3. AI와의 변증법적 유희 (The Ritual of Dialectical Play)


AI를 경쟁자나 대체재가 아닌, 상상력을 자극하는 스파링 파트너로 삼는 것이다. 이는 정(正)과 반(反)의 충돌을 통해 합(合)을 이끌어내는 변증법적 사유와 같다.


헤겔은 진리가 고정된 명제가 아니라 끊임없는 대립과 종합의 과정에서 드러난다고 말했다. AI와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나의 아이디어를 제시하면(正), AI가 다른 관점이나 반론을 내놓는다(反). 이 둘이 충돌하는 순간, 나도 AI도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제3의 통찰이 출현한다(合). 이는 그저 질문하고 답을 얻는 관계가 아니다. 서로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한계를 밟고 더 높이 도약하는 공동 창조의 과정이다.


실용 팁: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 스스로 직관적인 아이디어(正)를 먼저 나열해 본다. 그다음 AI에게 “이 아이디어와 완전히 반대되는, 가장 터무니없는 아이디어 10가지 제시해 줘”라고 요청한다. AI가 생성한 황당한 목록(反)을 보며 웃고 즐기는 사이, 뇌는 두 극단의 아이디어를 무의식적으로 결합하여 누구도 생각지 못한 제3의 길(合)을 찾아낼 것이다.


AI에게 정답을 구하지 말고, 내 안의 창발성을 깨우는 ‘점화 장치’로 활용하는 것, 이것이 AI 시대를 살아가는 창의적 인간의 핵심 전략이다.


데이터의 감옥에 갇히지 않을 권리


AI는 이미 인간이 쓴 글, 인간이 그린 그림, 인간이 작곡한 음악 대부분을 학습했다. AI는 인류 문명의 거대한 데이터 아카이브로서, 과거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조합해 내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단 하나의 일이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그 아카이브에 ‘없는’ 것을 꿈꾸는 일이다.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 아직 그려지지 않은 그림, 아직 울려 퍼지지 않은 멜로디를 상상하는 일. AI가 과거 데이터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 우리는 직관과 상상이라는 날개를 달고 그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


AI에게 길을 물을 수는 있지만, 가야 할 길을 꿈꾸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영역이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설명할 수 없는 느낌, 그 비합리적인 아이디어, 그 엉뚱한 상상을 무시하지 말자. 그것은 AI가 정복하지 못할 최후의 영토이자, 한 인간을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 신성한 빈칸을 기꺼이 끌어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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