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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프레임워크: AI 시대, 독서가 중요한 이유

AI 답변을 담는 인간의 그릇

by 류한석

AI는 인류가 쌓아 올린 데이터의 바다를 항해하는 경이로운 배를 제공하지만, 그 배의 목적지를 정하고 항로를 설정하는 것은 선장인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그 항해술의 정수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아날로그적인 행위, 바로 ‘독서’에서 비롯된다.


AI는 ‘무엇(What)’과 ‘어떻게(How)’를 능숙하게 답한다. 하지만 AI 답변은 기존 데이터의 통계적 조합일 뿐, 그 안에 철학적 깊이나 윤리적 고뇌, 인간적인 맥락은 부재하다. 단지 그럴듯하게 답변하는 것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서로 다져진, 각자의 ‘문해력과 교양’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든다.


AI에게 던지는 질문의 질은 내가 읽은 책의 깊이에 정비례한다. 오늘 밤 책을 읽으며 발견한 한 문장이, 내일 AI에게 던질 가장 예리한 질문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책 한 권을 제대로 읽는 것이 백 번의 피상적 검색보다 강력한 이유다.


AI 활용 격차를 만드는 핵심, 지적 프레임워크


‘지적 프레임워크(Intellectual Framework)’란 복잡한 아이디어, 개념 또는 문제를 사고하고 분석하며 이해하는 조직적인 사고 체계를 의미한다. 이는 개인이 정보를 이해하고 결론을 도출하며 의견을 형성하는 데 사용하는 인지적 구조 역할을 한다.


다양한 독서를 통해 머릿속에 구축된 사유의 틀, 즉 세상을 이해하고 정보를 조직하며 새로운 의미를 연결하는 정신적 구조물은 인간의 핵심 경쟁력이다. 튼튼한 지적 프레임워크를 가진 사람은 AI의 답변을 단지 ‘결과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프레임워크 안에 배치하고 검증하며 재해석하는 ‘재료’로 활용한다.


예를 들어보자. AI에게 그저 ‘정의란 무엇인가?’라고만 물어도, 플라톤부터 존 롤스의 이론까지 꽤 그럴듯한 요약문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정의란 무엇인가> 서적을 읽고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긴장을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이 질문을 재구성할 수 있다. "존 롤스의 ‘무지의 장막’ 개념을 현대 사회의 알고리즘 편향성 문제에 적용하여 설명하고, 마이클 샌델의 공동체주의적 관점에서 이를 비판해 줘."


이 두 질문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후자의 질문은 이미 질문자 안에 ‘정의’에 대한 자신만의 지적 프레임워크가 있음을 증명한다. 그는 AI를 지식의 창고가 아닌, 자기 사유를 확장하기 위한 스파링 파트너로 삼는다. 독서는 바로 이 프레임워크를 세우는 가장 확실하고 깊이 있는 방법이다. 책 속에 축적된 수천 년 인류의 지혜와 실패, 논쟁과 성찰은 우리의 머릿속에 단단한 뼈대를 세워준다.


물론, 후자의 정교한 질문조차 AI와의 연속적인 대화를 통해 유도해 낼 수 있다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근본적인 한계는 명확하다. 관련 지식, 즉 지적 프레임워크가 부재하다면 AI가 생성한 답변의 가치를 판별할 수 없다. 무엇이 핵심이고 무엇이 곁가지인지, 그 논리가 타당한지조차 알 수 없다. 결국 아는 것이 없으면 AI의 답변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데이터의 나열일 뿐, 사유를 촉발하는 영감이 되기 어렵다. 독서로 다져진 기반 없이는, AI는 강력한 스파링 파트너가 아닌 값비싼 백과사전에 머무를 뿐이다.


앎의 기반이 없다면,
AI 답변은 유용한 '재료'가 아니라 그저 '결과물'로 소비될 뿐이다.
독서를 통해 단단한 사유의 뼈대를 세운 사람만이
AI 답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 너머의 영감을 발견하며,
진정한 지적 파트너로 활용할 자격을 갖는다.


3단계 독서법: A-R-C 모델


그렇다면 이 거대한 기술의 파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실질적인 독서 전략으로 A-R-C 모델을 제안한다. 닻을 내리고(Anchor), 항해하며(Range), 성찰하는(Criticize) 과정이다.


1. Anchor (닻 내리기): 깊이를 더하는 ‘수직적 독서’

자신의 전문 분야나 가장 깊은 관심사에 해당하는 책들을 깊게 파고드는 단계다. 이는 지식의 바다에 흔들리지 않는 닻을 내리는 것과 같다. 마케터라면 필립 코틀러의 저작들을, 개발자라면 로버트 C. 마틴의 <클린 코드>와 같은 근본 서적을 여러 번 읽고 체화해야 한다. 이 ‘닻 내리기 독서’는 AI에게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부여한다. 내 분야의 핵심 개념과 맥락을 모른다면, AI가 생성한 그럴듯한 거짓말(Hallucination)을 판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Range (항해하기): 경계를 허무는 ‘수평적 독서’

닻을 내렸다면 이제 항해를 떠날 차례다. 역사, 철학, 과학, 예술, 경제 등 전혀 다른 분야의 책들을 넘나들며 읽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술과 과학을 넘나들며 시대를 초월한 통찰을 얻었듯, 이 ‘수평적 독서’는 이질적인 지식들을 연결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발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인류의 거시적 역사를 이해한 사람은, AI의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 보고서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지적 프레임워크를 넓고 유연하게 확장하는 과정이다.


3. Criticize (성찰하기): 질문을 벼리는 ‘비판적 독서’

마지막 단계는 모든 독서의 핵심이다. 책의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기 생각과 비교하며, 현실에 적용했을 때의 한계를 끊임없이 따져 묻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타당한가?’, ‘저자가 간과한 점은 없는가?’, ‘만약 나라면 어떻게 다르게 쓸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이 훈련은 AI가 제시한 답변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그 논리의 허점과 편향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비판적 사고의 근육을 길러준다.


인지적 삼각측량, AI 시대의 새로운 항해술


진정한 지성은 콘텐츠 너머의 맥락을 읽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데서 비롯된다. 독서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책을 읽는 행위는 저자의 가장 깊은 사유와 대화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책 속에서 수백, 수천 년간 축적된 인문 지식과 교양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와 접속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로소 AI의 답변이 얼마나 평면적인지를 깨닫고, 그 이면을 향한 날카로운 질문을 품게 된다.


그렇다면 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고 나아갈 수 있을까? 여기에서 '인지적 삼각측량(Cognitive Triangulation)' 개념을 소개한다. 이는 항해사가 별과 나침반, 지도를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듯, 세 개의 지적 좌표를 통해 정보의 가치와 깊이를 가늠하는 사유의 방법론이다.


1. 나의 관점 (My Perspective): 독서를 통해 축적된 나만의 지식 체계와 가치관.

2. AI의 답변 (AI's Answer): 빠르고 광범위한 정보 처리 능력의 산물.

3. 원전의 깊이 (Source's Depth): AI 답변의 근거가 된 핵심 텍스트, 고전, 원본 데이터.


대부분의 사람은 3번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자신의 막연한 생각을 AI의 그럴듯한 답변으로 확인하고 만족하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다. 하지만 지적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3번, 즉 '원전의 깊이'로 나아가야 한다.


AI의 답변을 출발점으로 삼되, 그것이 어떤 사상적 뿌리에서 나왔는지를 역추적하고 원전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다. AI가 생성한 요약본이 아닌, 저자의 목소리가 담긴 원전을 마주할 때, 우리의 이해와 통찰은 비로소 입체적인 것이 된다.


정보 소비자를 넘어, 지식의 큐레이터로


AI 시대의 문맹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질문하는 법을 잊고, 비판 없이 정보를 수용하는 사람이다.
AI는 강력한 도구이지만,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그 가치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정보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정보의 양이 곧 지혜의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유의 깊이가 없는 정보의 홍수는 우리를 표류하게 할 뿐이다.


독서를 통해 단단한 사유의 닻을 내린 사람은 AI라는 거대한 파도를 능숙하게 올라타는 서퍼가 될 수 있다. 그는 AI에게 명령하고, AI와 토론하며, AI가 제시한 정보의 조각들을 자신만의 맥락으로 꿰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지식의 큐레이터'가 된다. 반면, 독서의 닻이 없는 사람은 AI 답변의 홍수 속에서 부유하며,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정보만을 소비하는 표류자에 머물게 된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책장을 넘기며 느끼는 지적 설렘, 한 문장에 멈춰 서서 곱씹는 사색의 시간, 저자와의 느린 대화 속에서 형성되는 나만의 관점. 독서는 속도의 시대에 필요한 깊이의 기술이다.


기술이 인간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행위가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것은 바로, 한 장의 책장을 넘기는 시간이다. 그러니 책을 펼치자. 그 고요한 침묵과 사유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AI 시대를 지배할 가장 강력한 무기, 즉 대체 불가능한 ‘나 자신의 관점’을 벼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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