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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Thinking)와 생각된 것(Thought)

결론을 유보하고, 가능성을 열어두기

by 류한석
우리 머릿속은 하루 종일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근사한 공장이야.
그런데 재밌는 건, 우린 보통 완성품에만 감탄하고 정작 그것이 탄생하는
요란하고 정신없는 생산 라인은 잘 살펴보려 하지 않는다는 거지.
오늘은 그곳을 한번 둘러볼까?


우리는 흔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문장 속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이 섞여 있다. 하나는 생각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결과로 얻어진 생각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Thinking'과 'Thought'의 차이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그것이 창의성의 본질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정으로서의 사고, 결과로서의 사고

'생각하기(Thinking)'는 살아 움직이는 과정이다. 마치 물이 흐르듯, 한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변화한다. 아직 형태가 확정되지 않았기에 어느 방향으로든 흘러갈 수 있다. 반면 '생각된 것(Thought)'은 이미 형태를 갖춘 결정체다. 물이 얼음이 되듯, 유동적이던 사고가 하나의 개념으로 굳어진 상태다.


고착된 생각의 산물: Thought


'Thought'는 과거 생각(Thinking)의 결과물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우리의 지식, 경험, 기억, 편견, 고정관념, 사회적 통념 등을 모두 포함한다. 'Thought'는 일종의 정신적 지도나 라이브러리와 같다.

특징: 이미 구조화되어 있고, 패턴화되어 있으며, 효율적이다. 우리는 이 지도를 사용해 세상을 빠르고 쉽게 탐색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한계: 'Thought'는 본질적으로 과거의 기록이다. 따라서 이 지도 안에서는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없다. 기존의 길을 조합하거나 더 빨리 가는 방법은 찾을 수 있지만, 지도 바깥의 미개척지를 상상하지는 못한다. 이는 AI가 학습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패턴을 재조합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생각된 것'에만 의존하는 것은 이미 쓰인 책들로 가득한 도서관에서 책의 순서를 바꾸거나 요약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책을 쓰는 행위는 아니다.


살아있는 과정으로서의 사유: Thinking


'Thinking'은 'Thought'의 지배에서 벗어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질문하며,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정신 활동이다. 이는 명사가 아닌 동사이며, 고정된 결과가 아닌 역동적인 과정이다.

특징: 비선형적이고, 불확실하며, 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기존의 'Thought'가 만들어낸 경계를 의심하고, 당연한 것에 "왜?"라고 질문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행위다.

역할: 'Thinking'은 'Thought'라는 낡은 지도를 의심하고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과정이다. 이는 기존 도서관에 없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책을 쓰는 창조적 행위와 같다. 개념적 창의성은 바로 이 'Thinking'의 과정에서 발현된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빨리 '생각된 것'에 도달하려 한다는 점이다. 회의 시간에 아이디어를 내라고 하면, 사람들은 곧바로 완성된 답을 제시하려 한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라는 식의 명쾌한 해답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창의성은 그 이전 단계, 즉 '생각하기' 과정에 더 오래 머무를 때 싹튼다.


창의성은 서두름을 싫어한다

창의적인 사람들의 작업 과정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들은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다. 피카소는 한 작품을 위해 수십, 수백 장의 스케치를 그렸다. 작가들은 첫 문장을 쓰기 위해 며칠을 고민하기도 한다. 이들은 '생각하기' 단계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한다.


왜 그럴까? 너무 빨리 답에 도달하면, 우리는 익숙한 길만 걷게 된다. 뇌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이미 알고 있는 패턴을 선호한다. "이 문제는 저번에 이렇게 풀었으니까"라는 식으로 과거의 해법을 반복한다. 하지만 진짜 새로운 아이디어는 낯선 길을 걸어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낯선 길은 천천히, 주저하면서, 때로는 길을 잃어가며 걸어야 한다.


두 가지 모드를 의식적으로 분리하기


효과적인 창의적 작업을 위해서는 두 모드를 의식적으로 분리할 필요가 있다. 먼저 '생각하기' 시간을 충분히 확보한다. 이 단계에서는 평가를 유보한다. "이건 말이 안 돼", "이건 불가능해"라는 판단을 잠시 접어둔다. 마치 브레인스토밍에서 하듯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


실제로 많은 창의 전문가가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 디자이너들은 초기 단계에서 ‘크레이지 에이트(Crazy 8s)’라는 기법을 쓴다. 8분 동안 8개의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는 것인데, 그 핵심은 하나하나를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빠르게, 판단 없이, 일단 떠오르는 대로 그린다. 이것이 '생각하기' 모드다.


그다음에야 '생각된 것'을 정리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쏟아낸 아이디어들을 하나씩 검토하고, 평가하고, 발전시킨다. 이 단계에서는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순서다. 비판은 나중에, 생성은 먼저.


과정 속에 머무르는 용기

현대 사회는 빠른 결과를 요구한다. "결론이 뭐야?", "핵심만 말해줘"라는 압박이 도처에 있다. 이런 환경에서 '생각하기' 과정에 머무른다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진짜 가치 있는 아이디어는 바로 이 '사치스러운' 시간에서 나온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5~6시간 집필한다. 이 시간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경계’에 놓여있다.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상태, 논리적 사고가 판단을 내리기 전의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각하기'의 시간이다. 명확한 메시지나 구조를 먼저 정하지 않고, 그냥 쓰면서 발견해 나간다.


메타인지: 나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가

창의적 작업에서 중요한 능력 중 하나는 메타인지, 즉 자신의 사고 과정을 관찰하는 능력이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중'인지, 아니면 '생각을 정리하는 중'인지 인식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아직 '생각하기' 단계에 있는데, 벌써 결론을 내리려 한다. 한두 개의 옵션만 떠올리고 "이게 최선이야"라고 단정한다. 혹은 반대로 계속 아이디어만 쏟아내면서 정작 실행 가능한 형태로 다듬지 못한다. 두 경우 모두 문제다.


현명한 접근은 의도적으로 두 단계를 오가는 것이다. 충분히 탐색했다 싶으면 수렴의 시간을 갖는다. 반대로 너무 빨리 결론에 도달했다 싶으면 다시 발산의 시간을 갖는다. 마치 호흡처럼,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한다.


참고로, 아이디어는 'Thinking'과 'Thought' 사이의 경계에 걸쳐 있는, 혹은 그 둘을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 과정으로서의 아이디어: 아직 형태가 불분명하고 막연한 '실마리'나 '씨앗'에 가깝다.
- 결과물로서의 아이디어: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된 상태다.


불확실성을 견디는 힘

결국 'Thinking'과 'Thought'의 구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불확실성을 견디는 법이다. 아직 답이 없는 상태, 방향이 불분명한 상태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창의성은 바로 이 불확실한 공간에서 자란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생각들이 서로 부딪치고, 섞이고, 예상치 못한 조합을 만들어내는 곳. 이 혼돈의 시간을 성급하게 끝내지 말자. 그러니 답을 향한 조급함을 잠시 내려놓고, '생각하기'를 조금 더 사랑해 주자.


그 불확실하고 어쩌면 비효율적인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여전히 인공지능보다 더 창조적일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 이 글은 연재의 일부입니다. 앞선 내용을 확인하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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