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을 견디는 기술
철학자들이 수천 년간 고민한 질문을 AI가 0.5초 만에 답한다는 사실이,
어쩐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동시에 묘하게 자존심을 건드린다.
1817년 12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는 그의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정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이라는 개념을 처음 언급했다. 그는 이것을 "인간이 불확실성, 신비, 의심 속에 머물 수 있는 능력, 즉 사실이나 이성을 성급하게 추구하지 않고도 견딜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키츠가 말한 부정적 능력은 '부정적'이라는 말과 달리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더하지 않는 것, 자아를 내세우지 않는 것,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모호함과 불확실성을 성급하게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 상태 자체를 견디고 수용하는 태도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이유도 바로 이 능력 때문이라고 키츠는 보았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작품 속 인물들에게 명확한 답을 강요하지 않았고, 모순과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무관심이나 방관, 노력하지 않는 것,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것은 해당되지 않는다. 키츠가 말한 부정적 능력은 섣부른 결론으로 도망가지 않고, 복잡함 한가운데 머무는 용기다.
왜 지금 부정적 능력이 필요한가
우리는 즉각적인 답을 요구받는 시대에 산다. 검색창에 질문을 입력하면, 0.5초 만에 수백만 개의 답이 쏟아진다. SNS에서는 복잡한 사회 문제도 찬성과 반대, 흑과 백으로 단순화된다. 불확실성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우리는 항상 명확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인생의 많은 문제에는 단순한 해답이 없다. 사랑, 죽음, 정체성, 윤리적 딜레마 같은 것들은 본질적으로 복잡하고 모호하다. 이런 문제들 앞에서 성급하게 답을 내리려 하면, 우리는 진실의 일부만 보게 되거나 피상적인 결론에 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 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 이론은 단순하지만, 실천은 어렵다.
1. 판단을 유보하는 연습하기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 즉각적으로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로 판단하는 습관을 멈춰보자. 대신 "이것은 복잡한 문제구나", "더 지켜봐야겠어"라고 생각하는 연습을 한다. 이것은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성숙한 사고의 시작이다.
2. 모순을 견디는 법 배우기
한 사람이 동시에 선하면서도 이기적일 수 있고, 한 예술 작품이 아름다우면서도 불편할 수 있다. 이런 모순을 억지로 해소하려 하지 말고, 그 긴장 상태를 유지해 보자. 키츠는 이런 능력이 진정한 창조성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3. 질문과 함께 살아가기
모든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자. 어떤 질문들은 평생 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누구인가",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은 답보다 질문 자체가 우리를 성장시킨다.
4. 다양한 관점을 의도적으로 탐색하기
자신과 다른 의견, 불편한 관점도 진지하게 살펴보자. 상대를 설득하거나 논쟁에서 이기려는 목적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로 접근한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5. 예술 작품 깊이 경험하기
문학, 미술 등 위대한 예술 작품들은 대부분 명확한 메시지나 교훈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감상자에게 생각할 공간을 준다. 시를 읽고,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즉각적인 이해나 해석을 강요하지 말자. 그냥 경험하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6. 침묵과 비움의 시간 가지기
명상이나 산책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자. 정보를 입력하고 결론을 내는 시간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고 사유하는 시간 말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 부정적 능력은 자연스럽게 발달한다.
연습의 여정
부정적 능력은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명확함을 추구하도록 훈련받았다. 하지만 연습할 수 있다. 하루에 10분이라도 아무 목적 없이 글을 쓴다. 의미를 찾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쓴다. 무엇이 나올지 기대하되, 무엇이 나와야 한다는 기대는 버린다. 마치 산책하듯 글을 쓴다.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산책.
누구든 할 수 있다.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덜 확신하며, 훨씬 더 열린 마음으로.
부정적 능력이 주는 선물
불확실성은 불편하다. 하지만 진짜 창조는 이 불편한 공간에서 일어난다. 부정적 능력을 기르면 우리는 더 깊이 사고하고, 더 창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더 진정성 있게 살아갈 수 있다. 성급한 판단이나 단순한 이분법에서 벗어나, 세상의 복잡성과 풍요로움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게 된다.
키츠가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지났지만, 그가 남긴 부정적 능력의 개념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확실성에 집착하는 시대에, 불확실성을 품을 수 있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지혜의 시작이 아닐까.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
때로는 모르는 채로 머무는 것이,
성급한 답보다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답이 아니라, 질문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여유로운 발걸음인지도 모른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는다. 모든 걸 알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진짜 배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 이 글은 연재의 일부입니다. 앞선 내용을 확인하시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