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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Jul 09. 2023

호구는 알고 있다

잠 못 드는 밤에 니 생각



   

 요 며칠 잠 못 드는 밤을 보냈다. 자꾸만 그날의 목소리와 표정이 떠올라서였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일과 사람들의 말과 낯선 환경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실수하지 않기 위해 알게 모르게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그런데 이 ‘알게 모르게’는 종종 의도치 않은 문제를 일으킨다. 스스로 긴장 상태인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문제이다. 조금 더 스스로를 다독여 조심했다면 하지 않았을 실수이다.     



 ‘알게 모르게’ 응축된 긴장감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뻥-하고 터진다. 그리고 그 대상이 주로 나이가 어리거나, 착해 보이거나, ‘그래도 될 것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조금은 슬픈 사실이다.          



 그날은 내가 ‘그래도 될 것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뻥- 하고 터진 얼굴을 마주하며, 할 수 있는 한 차분하고 담담하게 지금의 상황과 나의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이 정도면 충분히 마음을 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상대가 뻥-하고 터질 때의 목소리와 표정은 며칠을 따라다녔다. 특히 늦은 밤이나 세상의 자극으로부터 벗어난 멍한 시간엔 더욱 그랬다.    


      

 언젠가는 익명으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점잖은 분들이 모인 곳에서 커피를 나눠주거나 뒷정리를 하는 일이었다. 편한 복장에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나이보다 어려 보였던지, 사람들이 지나치게 편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반말을 하거나, 말없이 턱짓을 하거나, 사소하거나 무리한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 요구했다. 점잖아 보이는 분들의 진면모를 보았다고 해야 할까. 반전 영화를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저렇듯 점잖아 보이는 분들이 ‘그래도 될 것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모습을 보이는 구나. 동등한 입장에서 단순히 봉사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무례하게 행동하는 저들이, 보수를 지급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왔을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혹시 지금 내가 ‘호구’로 보이는 걸까. 나는 내가 ‘호구’인지 모르고 살아왔는데, 알고 보면 말로만 듣던 ‘호구’가 나였던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순간 매우 중대한 사실, ‘호구는 알고 있다'는 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호구들은 진짜 세상을 볼 수 있다. 점잖은 척, 예의 바른 척하고 있지만 그들이 ‘그래도 될 것 같은 사람’들 앞에서는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당신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지 ‘그래도 될 것 같은 호구’들은 다 알고 있다.       


   

 소녀 ㅁ은 대표적인 웃상이다. 가만히 있어도 웃는 얼굴이라서 소녀 ㅁ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난다. 성격도 밝고 시원시원하다. ㅁ의 흥겨운 목소리는 종종 복도를 울리며 교무실까지 전달된다. 얼마 전 ㅁ의 반에서 ‘배려하며 말하기’ 수업을 할 때였다. 상대를 배려하며 말하는 태도에 대해서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나는 호구인가'에 대한 지난날의 고찰이 떠올랐다. 수업 중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사뭇 비장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ㅁ이 평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역시나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불현듯 소녀도 지금 이 순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똑같이 존중받아 마땅한데, 때론 그렇지 못한 순간을 경험할 때도 있지요. 선생님도 가끔 그런 일을 겪어요.      



라고 말하자 소녀 ㅁ이 놀라며 ‘선생님도요?’ 라고 묻는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고, 존중해주면 좋겠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치사해서 자기보다 어리거나, 착해 보이거나, ‘그래도 될 것 같은 사람’들에게 못된 말을 한다고, 나도 가끔 내가 ‘호구’인가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ㅁ은 ‘맞아요!!!’라고 놀랄 만큼 큰 소리로 답했다.       



 소녀 ㅁ을 바라보았다. 놀랄 만큼 큰 소리로 대답을 하고 있는 중에도 웃상이다. 늘상 성격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ㅁ은 사람들 속에서 은연중에 ‘그래도 될 것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될 것 같은 사람’에게 툭툭 던져진 말들은 ㅁ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남몰래 잠 못 드는 밤을 보냈을 수도 있고,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책망했을지도 모른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나를 보며 웃음지어 주는 누군가를 '그래도 될 것 같은 사람'이라 여기지 않고, 무례를 선사하지 않고, 여전한 존중과 배려로 대해줄 수는 없을까. 당신이 받는 상처를 저이도 받고, 때론 슬퍼하고 때론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줄 순 없을까.



그런데 ㅁ아...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인지 말이야.     



 라고 소녀 ㅁ에게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호구는 알고 있다'라는 제목의 책을 내볼까 하는데 어떠냐고 묻자, ㅁ은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맞아요. 저는 다 알고 있어요!! 선생님, 그 책 꼭 출간해주세요.
제가 꼭 읽어볼 거예요.     



 가끔 ‘나는 원래 그래’라고 말하며, 거침없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을 본다. 당신이 원래 그래서 생각보다 많은 이들은 잠 못 드는 밤을 보낸다. ‘배려하며 말하기’는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배운 대로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다.        


  

 우리 사는 세상 그 어디에도 ‘그래도 될 것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된다고 한 적 없다. 그래도 된 적은 늘 없었고, 언제나 그러면 안 되는 것이어서 아팠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천천히 또박또박 무례함에 마주하는 것이다. 차분하고 담담하게 나의 입장을 전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없으면 미움이 생겨난다. 솔직한 마음을 전달하고 나면 상대가 덜 밉다. 미움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괴로운 일이고, 무례한 상대를 미워하는 데 내 마음을 쓰기는 아깝다.           



 그리고 조금 천천히 용서해주는 것이다. 당신의 무례함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어서 나는 지금 불편하고 불행하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게 되길 원한다. 아마도 나는 당신을 용서하겠지만 내가 느낀 당혹감을 서둘러 접어버리고 싶진 않다. 나는 내 마음을 알아차려 주고, 당신도 당신을 알아차려 주길 바란다. 얼마쯤은 성찰하고 어느 정도는 후회도 하면서 다짐 같은 것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의 고달팠던 지난 삶을 떠올린다. 살아오는 동안 당신의 무례함은 분명 당신을 외롭고 쓸쓸하게 했을 것이다. 당신을 미워하진 않더라도 조금은 천천히 용서하고 싶다. 때론 당신의 무례함을 반찬 삼아 씹기도 하고, 이렇게 글로도 쓰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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