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처럼 Oct 09. 2024

어쩌면 우리의 보통날은


# 기억의 조각


 엄마가 깨우지 않아도 눈을 뜨는 아침이 있었다.

'치익!' 프라이팬에 뭔가 볶이는 소리. 온 방안에 퍼지는 고소한 냄새. 운동회나 소풍날이다. 방 안 한 편엔 놓인 도마 위엔 김밥이 탑처럼 쌓였다. 엄마가 김밥에 참기름을 바르고 깨소금을 뿌릴 때쯤, 누나와 형, 나는 도마 주변으로 다가갔다. 가장 먼저 잘린 김밥 꽁다리를 먹으려고. 가장 먼저 집어드는 사람이 꽁다리를 차지했지만 우린 다투지 않았다. 절로 웃음이 나고, 레는 특별한 날이었니까.


 엄마표 김밥은 세상에서 가장 컸다. 몇 개만 집어 먹어도 배가 부를 만큼. 아침 일찍 김밥을 많이 먹고 가도 점심시간이 기대되었다. 운동회 날 점심시간엔 엄마가 찾아왔다. 운동장 한편에 있는 나무그늘. 돗자리 위에 놓인 김밥이 너무 맛나서 급하게 먹었다.

"그렇게 맛있어? 천천히 물 마시며 먹어"

나를 바라보며 말하던 엄마의 흐뭇한 얼굴이 아직 또렷하다.


 소풍날 점심시간. 친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뚜껑을 열 땐 세상 모든 엄마들의 김밥이 모인 것 같았다. 소고기김밥, 참치 김밥, 작고 예쁘게 생긴 김밥, 밥보다 재료가 더 많이  김밥.

"햇살아, 니 김밥 정말 맛있어. 커다래서 그런가?"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재료가 부족해도, 모양이 투박해도 우리 엄마 김밥이 세상에서 가장 최고인 것 같아 깔깔대며 웃었다.       

 

 먹어먹고 싶은 엄마 김밥 먹던 날. 날 보다 엄마가 없는 운동회가 더 많았다. 작년과 똑같은 운동회인데 뭔가 달랐다. 점심시간 직전에 하던 박 터트리기. 박이 터지면 보이던 '즐거운 점심 시간 되세요'라는 문구가 싫어졌다. 나는 학교 앞 문구점에서 떡볶이 한 접시 사 먹거나, 누나가 싸 준 도시락을 교실에서 혼자 먹었다. 커다란 엄마 김밥을 먹은 것도 아닌데 계속 물을 마셨다. 자꾸 목울대가 아려서.   


 소풍날의 풍경도 달라졌다. 나는 아침 일찍 시장에 가서 김밥을 샀다. 일회용 플라스틱에 담기고, 겉은 신문지로 싼 다음 고무줄이 묵인 김밥. 점심시간이 되면 김밥을 꺼내기 싫었다. 도시락통이 아닌 일회용 플라스틱 통을 꺼내면 친구들이 나를 쳐다보며 말하는 것 같았다.

'너희 엄마는 김밥도 줘?'라고. 


 운동회나 소풍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날이니까 특별한 줄 알았다. 엄마가 없으니 바뀌었다. 평범한 날, 아니 가장 싫은 날로.

 



# 비 오는 날의 편지



엄마.

걷다 보면 발길이 멈추는 곳이 있어.

바로 '김밥집'이야.

요즘엔 김밥 파는 가게가 참 많아.

근데 엄마 김밥과 비슷한 맛은 없어. 

고소하고, 먹어도 또 먹고 싶은 그런 맛 말이야.


기억나? 엄마가 만든 김밥은 정말 컸어.

몇 개 집어서 오물오물 먹다 보면 배가 불렀지.

배 부르던 그 느낌이 자꾸 생각 나.

엄마 사랑을 듬뿍 받았던 유일한 기억이니까.


김밥이 커서 강렬했던 만큼

엄마 없는 빈자리도 크게 느꼈어. 

작게 좀 만들지. 그럼 허전했을 텐데.


어릴 땐 엄마가 마법사 같았어.

얼마 없는 재료를 가지고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을 뚝딱 만들어 냈으니까.


엄마, 나한테 마법 한 번만 걸어 줄래?

아프고 시린 마음 모아서 

김밥처럼 엄마 손으로 돌돌 말 사랑으로 바뀔 것 같아.


엄마.

운동회나 소풍은

친구들과 뛰어노는 날이라 특별한 알았어.

하지만 엄마가 밤하늘의 별이 되고 난 뒤

운동회도, 소풍도 평범한 날로 변했어. 

나중에야 알았어.

김밥 싼 엄마 손길이 특별한 하루를 만들었단 걸.


엄마와 함께하는 하루하루.

어쩌면 그 매일이 특별한 건데 

그저 평범한 하루같이 보이는 건

조용히 숨어 있는 엄마 사랑 때문인 것 같아.

늘 있는데 잘 모르는 공기 같은 사랑이랄까.

 

엄마.

어떤 시인은 생에 마지막 순간을

'세상 소풍 끝나는 날'이라고 

그 순간이 '소풍 시작되는 ' 같아. 

엄마를 다시 만나는 날이니까. 


엄마.

다시 소풍이 시작되는 날.

김밥을 만들어 줄래?

엄마 옆에서 옛날처럼 뜨고 싶어. 

지글 볶는 소리 듣고, 고소한 향도 맡으면서.


그리고 그땐 동그란 김밥처럼

엄마 두 팔로 동그랗게 나를 안아 줬으면 좋겠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