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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처럼 Oct 13. 2024

빨간색 사랑


# 기억의 조각


 한 밤 중 갑자기 잠에서 깨던 날이 있었다. 꽉 막힌 가슴, 차가운 귀와 손. 음식을 먹고 체한 날이다.  

'엄마' 하고 부르면 엄마는 내가 체한 줄 금세 알아차렸다. 항상 귀를 가장 먼저 만져 보고 등을 '툭툭' 등을 두드리던 엄마. 그 두드림이 답답한 속을 괴롭히는 누군갈 불러 내는 소리 같았다. 잠시 후 엄마는 반짇고리에서 바늘을 꺼냈다. 엄마가 손가락을 '콕'찌르면 '아야' 하는 나의 외침과 함께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엄마, 피가 왜 이렇게 새카매?"      

"체하면 피가 검게 돼. 엄마가 나쁜 피를 몰아냈으니까 금방 괜찮아질 거야"

 신기했다. 엄마 말대로 조금씩 속이 풀렸다. 엄마의 따뜻한 손이 배를 쓸어 주면 차가웠던 몸도 금방 데워졌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했던 손길. 아직도 난 그 따스함을 엄마 냄새처럼 기억하고 있다.  


 엄마가 없을 때 체하면 긴긴밤 잠들지 못했다. 그런 날은 속이 더 답답했다. 자꾸 울렁울렁하는 뱃속, 차가운 바람맞은 듯 덜덜 떨리는 몸. 체 했을 때 느낀 불편함은 불안감과 닮은 듯했다. 엄마 없는 불안감 말이다.

    

 엄마가 하늘로 떠난 뒤 거의 체하지 않았다. 매일 밤 엄마가 찾아와 아픔을 느낄 수 없는 바늘로 내 손을 콕 찌르고 돌아갔던 걸까. 지금도 음식을 먹고 잘 체하진 않는다. 체한 느낌이 들 때는 있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을 때, 내 마음결과 다른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땐 얹힌 기분이 든다. 그런 날엔 그립다. 툭툭 등을 두드리고, 콕콕 손가락을 찌르고, 쓱쓱 배를 문지르던 엄마 손이. 따끔하고도 따뜻했던 엄마 손은 왠지 답답한 감정도 뻥 뚫어 버릴 것 같다.              




# 비 오는 날의 편지


엄마.

내 곁을 떠나던 날, 걱정이 많았지?

아팠던 엄마는 아무 말 못 했지만

수많은 걱정 중 한 가지는 분명히 알 것 같아.

'우리 아들, 이제 체하면 어쩌지?'


정말 자주 체했던 것 같아.

아프게 등을 두드리던 엄마 손.

손가락을 찌르던 바늘.

겁나긴 했지만 참을 수 있었어.


엄마가 손을 따고 나면 

울렁하던 뱃속도 잔잔해지고, 

차가웠던 손발도 온기를 되찾았으니까.

 

엄마.

사랑이 무슨 색이라고 생각해?

빨간색이라 단정할 순 없지만

아플 때 지켜 주는 엄마 사랑은 붉은색일 거야.

 

체했을 때 엄마가 옆에 있으면  

손가락에서 흐르던 검은 피도 빨갛게 바뀌고 

창백했던 얼굴도 다시 붉어졌지.

엄마 손이 배를 쓱쓱 쓸면

한기가 들던 몸도 붉은 해를 품은 듯 따뜻해졌어.


신기하게도 엄마가 세상을 등진 

어른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체하지 않았어.

엄마가 체하지 말라고 마법이라도 걸고 떠났던 거야?


엄마.

지금도 음식을 먹고 잘 체하진 않지만

체한 느낌이 때가 많아.


오랜 시간 엄마 잃은 내 슬픔만 보여서 

모르고 살았어.

세상 사람 모두 아픔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는 걸.


누구나 아픔이 있다는 걸 아니까

숨겨 둔 마음 하나, 둘 내가 먼저 꺼내면 

이해해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내 마음꼼꼼하게 들여다 주는 사람은  귀.

세상엔 타인의 마음을 공감해 주는 사람보다

자신의 아픔이 제일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픔을 애써 무시하고 사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 같아.


내키지 않는 말을 하고 사는 것도 쉽지 않아.

모나지 않게 정감 있게 다가

다정한 마음으로 돌려주지 않는 사람들에겐

싫은 소리도 해야 하는데 나한텐 꽤 어려운 일이야.

 

가슴에 남은 아픔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동글고 싶은데 뾰족하게 말하고 나면

어릴 때처럼 속이 답답해.

뭐랄까. 감정에 체한 기분이 들어.  


엄마.

혹시 마음이 체했을 때 뻥 뚫어 주는 바늘도 가지고 있어?  

엄마가 있는 곳엔 그런 신비한 바늘도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한 날,

베란다에 가만히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볼 때가 있어.

노을이 지는 서글픈 시간,

엄마 바늘로 내 손가락 한번 콕 찔러 줄래?


그러면 왠지  

답답하게 만드는 나쁜 감정들은 싹 사라지고

붉은 해가 내뿜는 빛이 서글프지 않을 것 같아.

빨간 엄마의 사랑을 쬐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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