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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처럼 Oct 02. 2024

그런 척


# 기억의 조각


 갈색 소스에 고기와 채소가 듬뿍 들어간 면 요리. 짜장면을 처음 먹었던 건 누나의 초등학교 졸업식이었다.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2월. 중국집 특유의 쿰쿰한 냄새도 잊을 만큼 김이 모락모락 나던 짜장면이 너무 맛나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먹어 본 음식 중에 최고야! 나 졸업할 때도 꼭 짜장면 사줘."


 시간이 흘러. 형의 초등학교 졸업식에도 엄마는 짜장면을 사 주었다. 졸업식은 다 같이 짜장면 같이 먹는 날. 4학년이었던 나는 '2년만 기다리면 짜장면을 먹을 수 있구나' 싶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상을 등진 엄마의 졸업이 내 졸업보다 먼저였으니까.  


  내 졸업식엔 형 혼자 찾아왔다. 엄마가 올 것만 같았다. 자주 집을 비웠던 엄마도 형과 누나의 초등학교 졸업식엔 꼭 왔으니까. 축하한다며 형이 건네던 꽃다발. 그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꽃이었다. 졸업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 형이 말했다.

"햇살아, 우리 중국집 들렀다 갈까?"

 잠시 후 짜장면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고기와 야채도 듬뿍. 예전과 다름없는 짜장면이었는데 맛이 없었다. 내가 먹던 짜장면은 흥건하게 국물까지 생겼다. 짜장면이 내 마음을 알고 대신 울어 주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짜장면을 잘 먹지 않았다. 특히 졸업식엔 일부러 짜장면을 먹지 않았다. 어쩌다 먹으면 그릇에 꼭 덜어 먹었다. 국물이 생기지 않게, 슬픈 날이 떠 오르지 않게, 울고 싶지 않게.  




# 비 오는 날 쓰는 편지



엄마.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지만 

가장 싫어진 음식이 있어.

바로 짜장면이야.  


기억나?

누나 졸업식에서 처음 먹었던 짜장면 말이야.

엄마랑 처음 먹던 짜장면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어.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감탄하면서 먹을 정도였으니까.


엄마가 떠난 후엔 

짜장면이 가장 아픈 음식이 되었어.

먹을 때마다 자꾸 엄마 생각이 났거든.


신기한 일도 있었어.

엄마 없던 초등학교 졸업식 날,

형과 둘이서 먹던 짜장면에 국물이 생겼어.

엄마 생각에 눈물을 꾹 참고 먹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짜장면이 대신 울어 주는 것 같았어. 


그날 이후 짜장면을 그릇에 꼭 덜어 먹어.

국물이 생기는 게 싫어서. 슬픔이 드러나는 게 싫어서.


엄마.

초등학교 졸업 후엔 

짜장면 덜어 먹 듯 계속 감정을 숨기고 살았어.

나 혼자만의 습관인 줄 알았는데  

어른들은 전부 속마음을 감추고 사는 것 같아.


'그런 척'하며 산다랄까.

화가 나도 안 그런 척,

슬퍼도 안 그런 척,

부러워도 안 그런 척,

기뻐도 안 그런 척 해.


"엄마 없이도 참 잘 컸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해 준 말이야. 뭔가 모순 같았어. 

슬픔을 달고 살았는데 잘 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니까.

그저 방울방울 나오려는 눈물을 참고, 

괜찮은 척했을 뿐이야. 


엄마.

누나가 아이들(엄마 손주들)한테 자주 하는 말이 있어.

"다른 사람한테 하는 만큼 

엄마한테도 좀 상냥하고 예쁘게 행동해"

꼬맹이 조카가 함부로 행동하는 게 아니야. 

벌써 아는 거지. 


엄마는

상냥한 척, 예쁜 척

'그런 척' 하지 않아도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란 걸.


엄마.

요즘은 '그런 척'하고 싶지 않은 날이 많아. 

그만큼 솔직하지 못한 날이 많다는 거겠지?

그런 날은 뚜벅뚜벅 길을 걸어. 

밤하늘 올려다보며 혼잣말도 하지.

'오늘은 슬픈 하루였는데 기쁜 척했어'라고.

그럼 엄마랑 이야기한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편해져.    


엄마.

부탁이 있어.

내가 세상을 졸업하는 날, 축하해 주러 올래?

생전에 내 졸업식엔 엄마가 오지 못했으니까 

꼭 와줬으면 좋겠어. 


엄마의 축하를 받으면 

슬픈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지난날의 졸업식이 아니라 

진짜 기쁜 졸업식이 될 것 같아.

그러면 왠지 짜장면에 생긴 국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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