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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처럼 Sep 25. 2024

감정의 거울


# 기억의 조각


"받아쓰기도 100점 맞고 우리 햇살이 공부 잘하겠네."


 초등학교 입학 전 나는 공부를 잘하던 아이였다. 공부로 칭찬을 받고서 다른 것도 잘하는 척한 날이 있다. 누나, 형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질을 했다. '참 잘했어요' 숙제 검사용 도장 같던 엄마의 칭찬으로 방긋방긋 웃던 마음. 그런 마음만 가득했으면 좋았을 텐데 금방 틈이 생겨 버렸다. 방문 열고 나간 엄마가 잘 돌아오지 않으면서. 갈라진 틈으로 쌩쌩 차가운 바람이, 후드득 거센 비가 새어 들었다. 마음이 축축해지면서 나는 바뀌어 갔다. 공부 잘하는 아이에서 일기만 잘 쓰는 아이로.


 일기를 읽은 선생님들은 잘 썼다며 칭찬해 주셨다. 인정받으려던 게 아니어서 당황했다. 그저 느끼는 감정과 반대로 썼을 뿐이다. 어두우면 밝음을, 울고 싶으면 웃음을 표현했다.


 어릴 적 큰집에서 봤던 새끼 강아지. 집으로 돌아갈 때 나랑 헤어지기 싫었는지 멍멍 짖었다. '저 강아지도 엄마 없는 허전함에 짓는 것 아닐까?'생각했다. 일기엔 다르게 적었다.

'왕왕! 짓는 소리가 반가웠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강낭콩 실험을 했던 수업 시간. 샬레에서 싹 틔운 강낭콩을 화분에 옮겨 심은 적이 있다. 물을 주고 있는데 자그마한 창문틈으로 햇빛이 새어 들었다. 별 하나 보이지 않은 밤같이 어두컴컴했던 내 모습. 이런 나와 달리 이제 막 싹 틔우고 햇볕을 쬐는 강낭콩은 사랑을 듬뿍 받는 것처럼 보였다. 일기엔 반대로 적었다.    

'싹튼 강낭콩을 화분으로 옮겨 심었다. 물을 주고 햇볕을 쪼이니 금방 자랄 것 같았다. 강낭콩이 나처럼 밝게 자랐으면 좋겠다.'  


 초등학교 졸업 후 일기를 쓰지 않았다. 더 이상 숙제가 아니었으니까. 다시 일기를 쓰려한다. 엄마에 관한 일기를. 

'이젠 좀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걱정도 되지만 있는 그대로 쓸 것이다. '아픔은 드러 내는 순간 치유된다'는 말을 믿으면서.




# 비 오는 날 쓰는 편지



엄마.

엄마가 떠나고 정말 많이 울었던 것 같아.

울음 그친 날이 언제였는지 모를 만큼.

누나, 형도 많이 울었어.


어른이 되면 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우린 계속 울었어.

엄마 이야기만 하면

누나는 자꾸 화를 내고,

형은 별일 없다는 듯 강한 척했어.


나중에야 알았어.

이게 어른들이 우는 방식이란 걸. 

어른들은 마음으로만 울고,

눈물샘은 꼭 잠그고 사는 것 같아. 


엄마.

엄마의 부재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한

치료제가 뭔지 알아?

'자기 사랑'이래.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자기 사랑을 하면 된대.

난 사랑받은 적이 없어서 사랑하는 법도 모르는데 

너무 힘겨운 처방 같아.


사랑을 잘 몰라서 열심히 책을 읽었는데

자기 사랑은 엄마한테 배우는 거래.


엄마는 아이한테 감정의 거울이라서

엄마가 충분히 사랑을 나눠 주면

아이도 스스로를 사랑하지만 

엄마 사랑이 부족하면 자신이 싫어진대.


참 묘해.

사랑받아야 자신을 사랑하는 게 된다면

미움받아야 자신이 싫어지는 게 맞는데

왜 사랑받지 못했다고 자신이 싫어지는 걸까.


'나를 사랑하는 일'

단 한 줄의 글로 쓰는 건 이렇게 쉬운데

나한테 마음 쓰는 건 왜 이리 어려운 걸까.


좀 어렵지만 엄마.

난 열심히 자기 사랑을 연습하고 있어.


스스로 격려하는 게

자기 사랑이 아닐까 싶어서 자주 외쳤어.

'괜찮아 잘했어', '이 정도면 잘 살고 있어'라고.

별 효과가 없었어.

마음은 슬픈데 괜찮은 척, 거짓이 많았거든.

어릴 때 쓰던 일기처럼 말이야.


엄마.

나처럼 사랑이 부족했던 사람한텐

채우는 일 보다 비우는 일이 먼저인 것 같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가득 차 있어. 

엄마, 그리고 자기를 미워하는 마음이.


난 미움을 덜어 내려고 

엄마에 관한 일기를 쓰고 있어.

예전과 다르게 이젠 솔직하게 쓰고 있어.

쓸 때마다 주문도 외우고 있지.

'마음아, 제발 미운 감정 좀 치워 줄래?'하고 말이야.

그랬더니 조금씩 미움이 걷히는 기분이 들어.  


엄마.

난 계속 일기를 쓸 거야. 

울지 않고,

엄마를 미워하지 않고,

나를 싫어하지 않을 때까지.


미움이란 감정이 모두 사라지는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열심히 쓴 일기장 한가득 안고 엄마한테 가는 날,

미움을 전부 비웠을 거야.


엄마.

그땐 나한테 사랑 좀 듬뿍 나눠 줄래?

나도 엄마 사랑이란 감정만 고스란히 복사하고 싶어.

나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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