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인생길에 닿은 다정한 기도
그림책을 펼쳐본다. 밝고 부드럽지만 다운된 톤의 색감으로 표현된 텅 빈 배경. 가는 선으로 그려 작고 연약해 보이는 라일라와 대비되어 유난히 쓸쓸한 정서를 자아낸다. 하얀 스커트를 입은 어린 라일라는 모험을 떠나는 중인지, 헤매는 중인지 알 수 없지만 길 위에 서 있다. 첫 장면부터 라일라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라일라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우리는 작품 밖 서술자의 목소리와 함께 라일라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간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길에 비유한다. 나에게 인생은 고행길이었다. 인생은 허무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인생무상’은 우리 인생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라일라의 길은 무상하고 고되기보다는 따뜻했다. 라일라의 길을 함께 따라가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는 마치 예언처럼 가장 필요할 때에 알맞은 것들을 라일라 앞에 놓아두며 어린 모험가를 수호한다.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일까. 누구이기에 이토록 다정하게 소녀를 돌보는 것일까.
‘돌아와 라일라’의 작가 에바 린드스트룀은 “어린 시절은 항상 쉽지 않았고,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으며, 외롭고 길을 잃고 혼란스러워하지만 그 과정에서 즐길 수 있는 많은 즐거움들이 있다.”라고 말했다. ‘즐길 수 있는 많은 즐거움’이라는 대목을 읽고 다시 그림책을 펼쳐 보았다. 처음엔 목소리를 따라가며 읽다 보니 그 목소리가 누구일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외롭고 혼란스러우나 즐기며 걷는 라일라에게 시선을 두니 보이는 것이 있었다.
호수 앞에서 만난 에어 매트 위에 엎드려 호수를 건너는 라일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듯했다. 산딸기 요구르트를 집어드는 라일라가 선 곳은 아무래도 조금 아슬아슬해 보이는 높은 곳이었다. 가장 인상 깊게 시선을 사로잡은 장면은 거대하고 높은 바위산을 만난 라일라가 나무에 기대 누워 느긋한 태도로 산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다음 장면에서 라일라는 산의 정상에 있다. 그곳엔 마치 라일라가 올라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따뜻한 모닥불과 우산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풍경도 함께. 라일라는 편안한 자세로 산 아래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다. 아... 이제야 알겠다. 라일라는 이 모든 순간을 즐기고 있었구나. 기적처럼 앞에 놓인 행운은 라일라가 즐겁게 시도하지 않았다면 결코 만날 수 없는 것들이었구나.
스스로 산에 올라야 따뜻한 모닥불을 만나고 아름다운 풍경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높은 산을 올려다보던 라일라는 분명 “저 산 위엔 또 어떤 즐거움이 나를 기다릴까”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 영혼을 세 단계로 분류했다. 그중 마지막 변화 단계인 아이의 정신은 어린아이가 춤을 추듯, 놀이하듯, 자신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이의 정신은 비록 삶은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 하나 아이처럼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창조적으로 사는 것이다. 니체는 '초인(超人)'은 결과보다는 과정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새로운 단계로 오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린 모험가인 라일라는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정신을 지닌 초인인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시련 앞에 서기도 한다. 라일라가 만난 낭떠러지는 도무지 어찌해 볼 수 없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는 마치 우연이라는 듯 다리를 만날 수도 있을 거라 말한다. 라일라가 건너는 다리 건너편엔 누군가가 열심히 다리를 놓은 흔적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다음 장면에서 라일라만을 위한 정류장이 있는 걸 보면 다리 또한 누군가가 라일라만을 위해 만든 것이리라. 그것은 작가가 그림책 한 페이지에 그려 넣은 네 잎 클로버처럼 도전하는 모험가에게 찾아온 행운일까. 아니면 우리 인생을 돌보는 어떤 절대자의 성실한 흔적일까.
분명한 것은 나만의 힘으로는 인생의 길을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라일라 혼자 호수를 건너고 산을 올라야 했지만 결코 혼자는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길에도 다정한 목소리는 존재한다.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 이래라저래라 참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길을 가는지 미리 알고 알맞은 타이밍에 필요한 것을 예비해 둔다. 인격적이면서 다정한 이 존재는 고행길도 마다하지 않고 용감하게 모험을 떠나는 이에게 반드시 찾아온다.
두려움 없이 인생의 길을 가며 삭막한 바위산 앞에서도 저 위엔 어떤 즐거움이 나를 기다릴까, 삶을 긍정하는 이에게 보이지 않는 목소리는 분명 행운과 행복, 작은 기적을 예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 목소리가 나를 따라오는 것인지, 내가 그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인지 확실치는 않아도 결국은 맛있는 음식과 가족이 기다리는 집에 도착할 것이다. 간절한 그리움이 담긴 그 목소리는 언제나 나와 당신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중이다. 그 기도는 내 인생의 에어 매트가, 산딸기 요구르트가, 다리가 될 것이다. 그러니 두려움이 없이 인생의 길을 걷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