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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 Jan 16. 2024

나의 구석

회복의 장소

                 

그림책 '나의 구석'은 텅 빈 구석을 응시하는 까마귀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장을 넘기면 까마귀는 구석에 털썩 주저앉아 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구석이 마치 상처받아 공허한 까마귀의 내면 같아서였을까. 오롯이 홀로 견뎌야 하는 시간 같아서였을까. 작은 까마귀가 그 구석을 놀랍도록 포근한 공간으로 바꾸어 나가는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지지만, 까마귀의 지친 마음과 그것을 극복하는 공간의 힘, 시간의 흐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한동안 구석에서 까마귀는 멍하니 서 있거나 쭈그려 앉아 있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누워버리거나... 마치 내 계획과 다르게 구석으로 내몰린 인생이 된, 방향을 잃고 서성이는 이방인 같은 모습이다. 그랬던 까마귀가 서서히 그 공간과 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채우기 시작한다.


구석에서 떠나지 않던 까마귀는 어느 날 결심을 한 듯 움직인다. 푹신해 보이는 소파를 끌고 오고 동그란 러그를 깔았다. 높이가 낮은 이단 책장에 책을 정리해 꽂아 두고 스탠드 조명을 올린다. 따뜻한 노란색의 빛이 구석을 밝혔다. 그리고 화분 하나를 들고 온다.


그림책은 독자가 무심히 넘기기 쉬운 부분에도 의미를 담는다. 그것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면 까마귀를 통해 건네는 작가의 섬세한 위로를 찾을 수 있다. 나에게는 구석에서 까마귀가 화분을 돌보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까마귀는 늘 화분과 함께다. 화분 옆에 바짝 붙어 책을 읽고, 매일 아침 화분에게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넨다. 성실하게 물을 준다. 창이 없는 구석이라 햇빛 대신인 스탠드의 빛은 늘 화분을 향해 있다. 까마귀는 자신의 구석에서 이토록 섬세하게 화분을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돌보듯 화분을 돌보며 까마귀의 내면은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까마귀를 보니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다. 우울증을 앓던 한 영화감독이 침대 밑에서 네 마리의 새끼를 출산한 고양이를 발견했다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다.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고양이를 돌보는 일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온 마음을 다해 고양이들을 사랑했다. 5년 후 그는 첫 장편영화를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다. 고양이를 사랑하며 돌보았던 그가 우울증을 극복하고 세상밖으로 나왔다.          


나는 요즘 일어나자마자 식물들을 유심히 살핀다. 그런 다음 자고 있는 딸의 방을 살짝 들여다 보고 내내 시선으로 나를 따르던 강아지에게 아침을 준다. 특별할 것 없는 사소한 일상이지만 그 일상을 만들어준 그들 덕에 내 삶을 살아낼 수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던 내 무너진 삶을 재건할 수 있었다. 내 딸과 강아지를 돌보며 말이다. 어쩌면 우리 삶은 그런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모든 것을 지켜냈다 생각하지만 온전히 한 쪽의 희생만으로 만들어지는 삶이란 없다. 그들을 돌보며 내 삶은 서서히 온전해지고 그들도 나와 함께 단단해지는 것이리라.


구석에 숨었을 때조차 작은 생명을 성실히 돌보던 까마귀를 통해 냉정한 세상에서 상처받았을지라도 냉랭해지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반드시 다시 일어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이 그림책이 보여준다. 그렇게 까마귀는 쉼의 공간에서 자신을 돌보듯 화분을 돌보며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상은 필연적으로 나에게 상처를 줄지라도 우리는 결국 세상과 연결되어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나의 구석’은 까마귀에서 충분한 휴식을 선사하지만 거기서 끝내지 않는다. 결코 세상과 나를 분리한 채 나만의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 행복이라 말하지 않는다.


가톨릭 수도승이었던 토머스 머튼은 그의 책 『행동하는 세계에서의 사색』에서  물러남과 사색은 지금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 시간은 언제나 이 세상에서 져야 할 자신의 책임을 상기시킨다고 했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있는 ‘나의 구석’은 회복과 성장을 위한 특별한 시간, 즉 카이로스의 시간을 선사하는 장소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까마귀의 내면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어느날 까마귀는 벽에 창문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벽을 가득 채운 따뜻한 노란빛의 아름다운 창문들과 훌쩍 키가 자란 식물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치유된 까마귀의 내면 같았다. 자, 이제 이 그림책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만날 시간이다.


자신이 그린 창문으로 가득한 벽을 바라보던 까마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전기톱을 들고 들어왔다. 톱으로 벽을 자르더니 진짜 창문을 만들었다. 까마귀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아래에 누웠다. 참으로 평화로우면서 뭉클한 장면이다. 까마귀는 누워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감격일까? 망설임일까? 그렇다. 아직 결정적인 장면은 오지 않았다. 까마귀는 과연 닫힌 창문을 열 수 있을까. 까마귀 스스로 창을 열어야만 이 이야기는 완성됨과 동시에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당신에게 ‘나의 구석’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휴식도 좋고 도피도 좋다. 지금 상처 난 마음을 안고 구석에서 헤매고 있을지라도 괜찮다. 그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돌보며 위로할 수 있다.


나는 이 그림책 하브루타가 까마귀의 구석 같았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화분 같았으면 좋겠다. 함께 내면에 아름다운 창을 그리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상처 난 마음 그대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길 바란다. 그리고 토머스 머튼의 말처럼 세상을 향한 나의 책임을 다하길 바란다.


상상해 보라. 진짜 창문을 낸 까마귀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은총 같은 햇빛 아래 누워있는 장면을. 삶을 온전하게 만들어 줄 용기 있는 선택 앞에선 당신은 햇살처럼 눈부실 것이다. 그리고 까마귀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마침내 일어나 창문을 열고, 당신이 경험한 사랑과 치유의 경험을 타인과 나눌 것이다. 나는 믿는다. 세상은 변한 게 없고 여전히 힘든 일 투성이라도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는 용기는 서로를 돌보는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이곳, 내 구석에서 시작하자.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인사를 나눌 그날은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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