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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 May 12. 2024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이 길을 기꺼이 가는 이유


북쪽에 겨울이 찾아오자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난 새를 그리워하는 곰의 편지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곰은 곧 겨울잠을 자야 하지만 도통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곰은 결국 세상 끝에 있는 새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어쩌면 곰은 따뜻한 굴 속에서 편하게 겨울잠을 자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푹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따뜻해진 북쪽으로 새가 날아올 테니 말이다. 그냥 기다리면 될 일이다. 곰은 왜 굳이 멀고 험한 길을 떠나는 선택을 했을까. 본능을 거슬러 너를 만나기 위해 세상 끝까지 가고야 말겠다는 결심은 대체 어떤 종류의 사랑이기에 가능한 것일까. 


새를 만나겠다는 열망으로 씩씩하게 여행길에 올랐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집을 떠나 먼 길을 가는 것인지라 아무도 다니지 않는 어두컴컴한 숲을 지나는 것이 겁난다. 그러나 오직 새만을 생각하며 숲을 통과한다. 밤새 도깨비가 나올 것 같은 숲을 빠져나와 어스름한 새벽의 강가에서 물을 마시는 곰의 뒷모습에 내 시선이 멈추었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실체 없는 두려움이었다. 어둠 속 형상들은 내면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상임에도 주저앉아 포기해 버린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일까. 첫 번째 관문과도 같았던 내면의 두려움을 이겨 내고 맑은 강가에서 목을 축이는 곰의 뒷모습은 이 그림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나의 가슴을 울리는 장면이다.  이로 인해 곰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어려움을 이겨낼 용기라는 무기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늘 처음이 가장 두려운 법이니 말이다. 새를 향해 가는 동안 곰의 여정은 역시나 순탄치 않다. 그물에 걸리기도 하고, 전쟁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두렵고 지치는 순간마다 곰을 돕는 도움의 손길들이 존재한다. 홀로 시작한 모험이었지만 그 길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 덕분에 곰은 낯선 여행길이 외롭고 두렵지만은 않다. 새를 만나러 가겠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여행은 예측하지 못했던 수많은 경험과 만남을 통해 곰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김기림 시인이  자신의 수필 '단념'에서  

'모든 것을 아주 단념해 버리는 것은 용기를 요하는 일이다. (중략) 그런데 이와는 아주 반대로 끝없이 새로운 것을 욕망하고 추구하고 돌진하고 대립하고 깨뜨리고 불타다가 생명의 마지막 불꽃마저 꺼진 뒤에야 끊어지는 생활 태도가 있다. 돈 후안이 그랬고 베토벤이 그랬고 '장 크리스토프'의 주인공이 그랬고 랭보가 그랬고 로렌츠가 그랬고 고갱이 그랬다. 이 두 길은 한 가지로 영웅의 길이다.'라고 했다.

시인은 이 두 길은 영구적 적멸로 혹은 부단한 건설로 향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보통의 우리들은 얼마간 욕망하다가 얼마간 단념하는... 아주 단념도 못하고 아주 쫓아가지도 않는 그런 안전한 삶을 선택한다. 


곰에게 있어선 겨울잠을 자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일 것이다. 동굴 속에선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만날 일도 없고, 봄이 되면 새는 어김없이 곰에게 올 테니 말이다.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이 있을까. 그러나 곰은 적당히 욕망하지도, 적당히 단념하지도 않는 영웅의 길을 택했다. 그 길에서 새에게 쓴 편지에 곰은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숨기지 않는다. 곰이 선택한 길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두려움과 맞서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곰은 왜 그런 길을 기꺼이 가는 것일까. 이미 알고 있듯이 그 길의 끝에 새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타인이라는 세계에 닿기 위해 이토록 무모하게 자신을 던져본 일이 있는가. 적당히 욕망하고 적당히 물러서며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한 관계만을 택하진 않았는가. 물론 이유는 있다. 지독히도 냉정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용감히 발을 떼는 일은 그림책에서나 나올만한 일이다. 현실에서 그런 순진한, 혹은 순수한 삶의 태도는 '부단한 건설'은커녕 '영구적 적멸'로 가는 지름길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붙들고 절대 놓지 않는 믿음이 있다. 무모하게 나를 던져 기꺼이 걸어간 길이었음에도 지치고 외로우며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내게 누군가는 손을 내밀고 따스한 곁을 내줄 것이란 믿음 말이다. 몇 주간이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곰에게  자기 집에서 잠시 쉬어 가라며 붙든 상냥한 고양이가. 낯선 곰을 흔쾌히 파티에 초대해 준 고양이의 동물 친구들이 우리의 현실에도 존재한다. 그런 이들 덕분에 곰은 힘든 여행 중에도 오랜만에 푹 잠을 잘 수 있었고, 즐거운 일을 만났다. 이뿐이랴, 마음이 잘 맞는 곰친구를 만나 얼마간 함께 여행하며 두려움도 잊을 수 있었다. 세상은 지독히도 냉정하고 위험하지만 또 한편으로 순수하고 순진한 모험가들로 인해 따뜻하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돕는다. 위로한다. 그러니 두렵더라도 기꺼이 타인이라는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자. 타인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 안전한 방법이 아닌 무모할 만큼 순수하게 마음을 던지는 이들에게 삶은 뜻밖의 선물을 안길 것이다. 


곰의 긴 여행이 드디어 끝났다. 나는 곰이 도착한 그 세상 끝에서 새를 만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놀랍게도 새는 없었다. 새도 곰이 보고 싶어 곰이 사는 북쪽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세상에! 그러나 새 또한 용감하게 타인의 세계로 들어간 모험가인 만큼 곰의 바람대로 곰의 친구인 여우와 비버와 오소리가 새를 잘 돌봐주고 있을 것이다. 곰이 따뜻한 남쪽 섬에서 새의 친구들과 기분 좋게 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뒤 곰은 다시 새를 만나기 위해 섬을 떠나 다시 모험을 시작한다. 이번엔 새의 친구들 덕분에 상상도 하지 못한 신나는 방식으로. 이 상상도 못 한 방식의 여행은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두려움 없이 삶을 던진 자들에게 신이 주는 선물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 선한 결말을 맺는 신의 섭리는 새와 곰이 만나 포옹하는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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