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누나와 다투다가 어머니에게 크게 혼난 적이 있다. 마음 여린 어머니지만, 그날만큼은 강력한 훈육을 위해 추운 날에 남매의 옷을 홀딱 벗겨서 내보내셨다. "엄마 너무 추워요 잘 못했어요 제발 집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라는 말을 단독주택의 철제 대문 사이로 뱉었다. 그날의 대문은 교도소 감옥의 쇠창살 같았다. 쇠창살 사이로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에도 어머니는 완고하셨다. 얼어 죽을 것 같아 파리처럼 두 손을 맞잡고 빌어서 집에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결국 고해성사로 죄 사함을 얻었다. 어린 시절이라 벌거벗겨지는 부끄러움보단 추위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것이 차병원(당시 차산부인과) 출생 이후 최초의 벌거벗음이었다.
옷을 입어도 벌거벗은 것처럼 쪽팔릴 수 있다는 것은 성인이 되어서 배웠다. 가장 창피했던 기억을 꼽으라면 나의 결혼식. 신랑이 신부에게 축가 해주는 몹쓸 트렌드를 주제파악도 못한 채 따라 했다. 노래만 했어야 했는데 피아노 반주까지 했다. 한 곡만 불렀어야 했는데 젠장 두 곡을 불렀다. 이적의 '다행이다'가 끝나는 부분에서 성시경의 '내게 오는 길'을 후렴을 연결해서 불렀다.
결혼식 축가에서 "인간의 존엄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구나!"라는 심정을 느꼈다. 나의 존엄을 해친 결혼식 DVD동영상을 10년이 지나도 보지 못했다. 아니 20년이 되어도 볼 자신이 없다. 알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자신이 마이크 잡고 대중 앞에선 동영상을 다시 보기 하는 일은 사람을 땅굴 파는 두더지로 만든다는 것을.
언제 어디서나 벌거벗김 당하는 것은 쪽팔리다.
'아름다운 죄'로 '벌거벗김' 당한 여자
"말레나에게 죄가 있다면 너무 아름다운 것이 죄입니다"
법정에서 한 변호사가 매혹적인 여성을 변호하며 이런 말을 한다. 아름다움이 죄가 되어 마을 광장에서 공개처형 당하듯 벌거벗김 당하는 여자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결과는 모니카벨루치 주연의 영화 '말레나'에서 볼 수 있다. 오래된 영화지만, 인간의 욕망과 질투 등을 여주인공의 몰락을 통해 나타내주는 영화다. 잠깐 영화로 초대한다.
유부녀 말레나는 아름다운 얼굴과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 그녀가 나타날 때마다 남자들은 침을 질질 흘리는 수사자가 된다. 수사자들의 마음을 독점한 말레나는 평범한 마을 암사자들에겐 영역을 침범한 질투의 대상일 뿐. 말레나는 전쟁터에 나간 군인 남편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조신한 여자였기에 번식기 수사자들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해 왔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자신의 남편과 바람이 났다"며 그녀를 법정에 고소한다. 무죄로 풀려났지만, 변호사 선임료가 없어서 변호사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숱한 어려움에도 남편을 기다렸던 그녀는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국가로부터 받던 연금지원도 끊겼다. 여주인공은 지켜왔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기 위해 창녀가 됐다. 결국 소문만 무성했던 '몸 파는 여자 말레나'는 아낙네들의 바람처럼 현실이 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동네 여인들의 마녀사냥으로 말레나가 마을 광장에서 능욕을 당하는 신. 절정답게 인간사에 존재하는 시기, 질투, 욕정, 무관심 등을 모두 보여준다. 그녀는 마을 광장에서 여성들에게 집단 폭행당한다. 머리는 가위로 잘리고 옷은 찢어져 상체가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주인공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울며 포효했다. 그때 찝쩍 남들은 그녀를 노리개로 삼았던 치부를 들킬까 봐 여주인공의 고통을 애써 외면한다. 마지막 신은 작품성이 강조되는 영화의 백미였다.
영화 말레나
착실하고 정숙했던 한 여성이 점차 노리개로 전락하는 영화 말레나. 그녀를 변호하고 겁탈했던 변호사의 증언처럼 '너무 이쁜 것이 죄'였다. 이제껏 보아온 가장 치욕스러운 벌거벗음을 이 영화에서 만났다. 육체와 내면을 함께 벌거벗김 당한 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게 됐다.
학교에서 벌거벗는 고등학생
다시 나의 벌거벗음 이야기로 돌아온다. 사람은 컴플렉스를 벌거벗김 당할 때도 쪽팔리다. 학창 시절 누구보다 가난했고 명문대 가는 성공 스토리를 사무치게 갈망했다. 고등학교 때 전교에서 태도 좋은 모범생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항상 이해력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닫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열개를 알려주면 열개 모두 되짚어야만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의 변비'를 해결하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며 학업을 따라갔다. 나의 저주받은 뇌는 고학생의 갈증과 절규를 품어줄 수 있는 아량이 없었다.
용기 있게 행동했다. 가난하고 머리 나쁜 것을 대중 앞에서 인정하며 "다시 한번 설명해 주세요"를 입에 달고 살았다. 쪽팔리기 싫다고 '이해 한 척' 하면 성적이 상승할리 만무했다. "쟤는 수업을 듣고도 왜 맨날 이해를 못 하냐?"라는 무시도 받아들였다. 친구들에게 질문하는 것도 찬스가 끝나면 선생님찬스를 써야 했다. 그래서 교무실을 찾았던 것이다.
쉬는 시간에 교무실까지 가서 선생님들에게 교과서도 아니고 문제집 갖고 가야 하나? 친구들이 모범생코스프레라고 욕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워낙 간절했기에 벌거벗겨졌다는 생각으로 문제집을 갖고 교무실 투어를 했다. 달콤한 휴식 시간을 보내고 계신 각 교과선생님들께 나는 '브레이크 타임 브레이커'였다. 모범생 이미지 얻고 싶어서 Show 한다고 오해하던 친구도 있었지만, 살기 위해 교무실을 다녔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머리 나쁨에 대해 인정하는 연습을 했다. 그것은 대중 앞에 나의 컴플렉스를 벌거벗기는 연습이었다.
교무실 투어는 부인하고 싶은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벌거벗는 성숙의 여정. 이를 통해 '객관적 자기 이해'라는 귀한 무기를 얻었다. '자기 이해'라는 무기는 20년 이상 진화하여 '두뇌 혁명' 수준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줬다. 저성과에서 고성과 인생으로 바뀌고 있다.
포기하지 말고 자신을 관찰하자! 부족함을 인정하고 벌거벗자
똥차 파랑새가 나를 벌거벗긴다
벌거벗음을 통해 자기 이해의 여정을 나눴다.
영화 말레나에서도 나왔듯이 질투, 시기, 비교는 인간의 본능이다. 한국은 1등부터 꼴등을 만들어내는 줄 세우기식 열등감 사회다. 인간의 본능과 대한민국의 열등감 사회가 만나 우리에겐 최악의 습관이 몸에 배였다.
그것은 바로 "서열화"
한국 사람은 끊임없이 주변과 비교하고 자신의 서열을 은밀히 체크한다. 전체에서 내가 중간은 가는지 상위권인지 계속 서열을 확인한다.
"40살에 순자산 8억인데 잘 사는 편인가요?"라는 인터넷 글을 본 적 있다. 게시자의 의도는 "내가 돈을 잘 모은 거냐?" 위로 혹은 칭찬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댓글에는 격려도 있지만 각종 시기와 배아파리즘이 난무했다. "남과 비교해서 평가해 달라"라는 게시자의 의도와 댓글 모두 어딘가 씁쓸했다.
아파트 가격을 기준으로 신분을 나누는 인터넷 짤도 많이 돌아다닌다. '아파트 계급도'라고 치면 "강남구 살면 왕족! 송파구 살면 귀족!"이라는 식의 배치표가 있다. 점점 평민, 천민으로 내려가다 노비, 가축으로 등급이 내려간다. 자녀들이 볼까 두려울 정도로 민망하다. 그밖에 아파트 말고도 계급도라는 것을 치면 차, 명품 등등 다양한 계급이 나온다.
주변을 의식하는 우리 국민은 "자기 어필을 통해 높은 서열을 차지할 수 있다"는 거짓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자동차는 서열을 높이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과노력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자기 이해' 지름길이며 '벌거벗기 능력'이기 때문이다.
BMW 팔고 똥차를 타며 나를 벌거벗기는 판단력을 배운다. 열등감 사회를 이겨내자.
사회 생활하며 똥차 타면 얕보지 않을까? 분수에 맞게 소박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두려워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