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기엔 적당히 게으른 농부의 삶을 택하신 우리 아버지는 스포츠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논밭에서 쟁기질하시다 축구중계 보겠다고 도중에 쟁기를 세워 놓고 집에 돌아오실 정도였으니 말이다.
1970년대 중반 아시아농구대회가 필리핀에서 개최되었다. 당시만 해도 아시아 농구는 한국과 필리핀이 우승을 다투던 때였다. 요즘도 필리핀은 농구가 국기라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농구를 무지 좋아하는 국민들인가 보다. 당시 한국 대표팀에 불세출의 스타 신동파가 버티고 있을 때였다.
겨울밤 9시 마닐라에서 한국대 필리핀의 아시아 농구대회 결승 경기가 있었고, 아버지와 나는 라디오 중계를 듣기로 약속했다.
저녁을 먹고 나는 책을 읽고 아버지는 내 옆에서 소쿠리를 짜면서 중계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나는 중간에 잠들어 버렸다. 겨울날 이른 저녁을 먹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꼬마가
책을 읽으며 몇 시간씩 기다린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아버지께서 경기 내용을 모두 기록해 두셨고 그걸 읽어 보라고 주셨다.
"전반 몇 분에 아무개 선수 2골, 몇 분에 아무개 선수 반칙" 이렇게 말이다. 당시에는 경기가 이렇게 되었구나 생각하며 읽었는데 나이가 좀 들어서 보니 곤히 잠든 사랑하는 아들을 깨우지도 못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경기 내용은 궁금해할 것 같고, 그래서 라디오 중계를 들으면서 경기 내용을 연필로 써 놓으신 것이다.
책을 읽다 그대로 잠들어버린 아들과 그런 아들을 위하여 경기 내용을 연필로 써 놓으신 아버지. 지금 생각해 보면 가슴이 찡하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넉넉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아버지는 내게 그런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주셨다.
노동자 계급으로 해석되는 프롤레타리아는 원래 어원이 "재산이라고는 자식밖에 없는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나 역시 재산이라고는 자식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고 애들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물려줄 게 없지만 아버지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라도 물려주겠다고 결심했었다. 우리 아버지가 내게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