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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속에 잠긴 봄

by 이지원 Mar 31. 2025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내가 올해의 봄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찾아오는 풍경은 낡은 커튼과 먼지덩이가 굴러다니는 작은 방밖에 없을 것 같았다.


 생크림을 덮어쓴 케이크 위의 딸기도, 바람을 타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던 봄의 꽃잎도 어쩐지 먼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나는 봄바람이 건네주는 향기를 참 좋아했는데 이제는 그 향기를 느낄 수가 없다. 요 며칠 사이 겨울의 얼굴을 한 낯선 계절이 찾아온 탓도 있지만, 수없이 많은 일에 발이 묶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며칠 전 건조기에서 꺼내 온 보송한 옷들을 개어두지도 못했다. 한 주의 끄트머리에 주어진 꿀 같은 주말이었건만 잠에서 깨어나면 새로운 일이 자꾸만 쌓였다. 유월 즈음에 마감해야 할 커다란 프로젝트의 설문지와 레포트의 초고를 내내 수정했으며, 일주일 간의 학습 내용을 정리해 도움을 받는 학생에게 전달하고, 증빙자료를 작성하는 것에 휴일을 전부 넘겨주고 말았다. 나는 더 이상 작년 봄처럼 산책을 할 수 없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예쁜 옷을 보거나 좋아하는 그림을 자주 그릴 수도 없었다. 하얗게 핀 꽃을 눈에 담고, 떨어진 꽃잎을 손바닥에 올려둔 채로 감상하는 봄 한정 취미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삐걱대며 돌아가는 기계의 부품이 되어버렸다.


 동급생에게 도움을 주는 근로학생으로 일하며 받는 월급이 그나마의 보람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지급까지는 한참 남아, 나는 통장에 저금해 둔 돈으로 아주 가끔씩 간식거리를 사 먹으며 희미한 행복의 존재를 확인해야만 했다. 폭신하고 달콤한 행복이 혀 위에서 이리저리 굴려지다 사라지면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가지 마, 사라지지 마. 의미 없는 말들로 목을 타고 내려간 행복의 뒤를 쫓았으나 다시 돌이킬 수는 없었다.


 마감기한이 임박한 일들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서야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무심코 내리깐 시선은 길게 자란 열 개의 손톱에 내려앉았다.

깨지고 부러지는 일이 다반사였으나 탑처럼 쌓인 일에 압도되어 좀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곳이었다. 자기 자신을 얼마나 잘 관리하는지는 손톱에 드러난다던데, 나는 단정함과는 꽤 거리가 먼 사람이 되었구나. 씁쓸한 맛을 입안 가득 느끼며 새로운 한숨을 쉬었다.


 그다음으로 시선이 닿은 곳은 등 뒤로 펼쳐진 너저분한 방의 풍경이었다. 개어 놓지 못한 옷들은 아무렇게나 구겨진 채로 카트 안에 잠들어 있었다. 제대로 청소도 하지 못해 긴 머리카락이 바닥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으며, 입었던 옷들은 의자의 다리를 붙잡고 널브러져 있거나 옷장 앞에 대자로 드러누워 있어 마치 뱀의 허물과도 같았다. 썼던 물건들은 제자리를 잃고 책상 이곳저곳에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간단히 말해, 난장판이었다.


 잔뜩 어지럽혀진 이 방에서 유일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는 줄곧 사용해 왔던 노트북뿐이었다. 나의 엉덩이를 무겁게 짓눌리도록 한 장본인으로, 마음에 납덩이를 매다는 데 기여한 일등 공신이었으며, 전자기기를 오래 보는 것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제대로 일깨워준 물건이기도 했다. 굳이 몸으로 체감하며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적어도, 내가 감상하고 싶었던 것은 따스한 봄 풍경과 이따금씩 들려오는 새의 노래였지, 기분 나쁠 정도로 뜨듯한 노트북의 온도와 신경질적인 팬의 소음은 아니었다.


정말, 그것만은 확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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