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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댄스 Nov 14. 2024

머물러 주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대학교 전공과목 수업 때 일이 기억난다. <대인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과목이었는데 다른 과목에 비해 외워야 할 것도 적고, 무엇보다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의 스킬과 이론적 기초를 배우는 과목이었기에 무척 재밌게 임했던 기억이다.


정확한 과제의 주제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한 조의 발표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 단어로 부정과 긍정의 의미를 모두 전하는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마법의 단어가 있다는 골자였는데, 그 단어는 바로 "쩔어"였다. 언론정보학과 전공 수업답게 끼가 많은 학생들이 많았는데, 적절한 상황극까지 곁들이니 경쟁 관계지만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시험 어땠어? 잘 봄?

아 몰라, 문제 완전 쩔었어.


소개팅 어땠어?

우와 진짜 대박 쩔었어.


이 두 가지 상황극을 펼치면서 표정과 뉘앙스로 맥락을 다르게 만들어 내는 신들린 연기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다. 그 친구들에게 A+ 줬어도 이견이 없을 만한 멋들어진 발표였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은 이런 건가 보다.




오래전부터 '머무르다', '머물다'는 말을 친애해 왔다.


1. 도중에 멈추거나 일시적으로 어떤 곳에 묵다.
2. 더 나아가지 못하고 일정한 수준이나 범위에 그치다. (네이버 국어사전)


내가 이 단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한 단어에 두 가지 뜻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만남과 이별좌절과 용기다.


머무르다에는 오다와 가다, 만나다와 떠나다의 뜻이 동시에 들어있다. 누군가 머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떠날 것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는 '들르다'라는 단어가 있지만 울림소리만으로 이뤄진 머무르다에 비해 발음도 탁하고, 정말 잠깐 동안만 왔다 간다는 맥락이 담겨 있어서 그런지, 머물다만큼 정이 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네 삶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머무르다가 아닐까 싶다. 인생이라는 휴가지에 왔다가 좋은 꼴 나쁜 꼴, 이 꼴 저 꼴 다 보지만 결국 떠나야만 하는 것이 섭리이기에, 삶은 그저 머물다 가는 것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소소한 일들에 일희일비할 것이 없을 것만 같다.


이런 생각도 든다. 떠나야 할 인생이라도 일정 시간만큼은 반드시 매여있어야 하는 것이 머묾의 본질이다. 떠날 것이라고 대충대충 지낼 수만은 없지 않나.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 좋은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떠날 때 떠나가는 사람도, 남아있는 사람도 웃으며 안녕할 수 있지 않을까.


머무르다에 대해 앞서 설명한 국어사전의 첫 번째 의미(도중에 멈추거나 일시적으로 어떤 곳에 묵다)는 두 번째 의미(더 나아가지 못하고 일정한 수준이나 범위에 그치다)를 지탱해 주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봤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없이 겪는다, 어쩔 수 없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치고야 마는 순간을. 그 순간마다 좌절하겠지만, 잠시 멈추는 것이라 생각해 보면 어떨까. 머묾의 또 다른 본질은 나아감이기에, 더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금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머무르다라는 말에서 나는 보았다.


그리고,


만남은 쉽고, 이별은 늘 어렵다


만남과 이별의 사이, 머묾의 시·공간이 유독 애틋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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