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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엔지니어 May 11. 2024

장래 희망에 의사라고 적었었다

초등학생 시절을 생각하면 마치 어제일 처럼 또렷하게 생각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나는 주로 내가 살던 아파트 상가에 있던 문구점에 가서 수학 문제집을 사다 풀곤 했다. 아무도 풀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내가 수학문제집을 푸는 것을 좋아해서 틈나는 대로 사다 풀었다. 하루는 내가 또 문제집을 사러 문구점에 가자 문구점 아주머니가 수학 문제집을 참 많이 사간다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드나드는 그 문구점에 아주머니가 내 얼굴을 기억할 정도로 나는 문구점에 가서 있는 대로 수학 문제집을 사다가 푸는 아이였다.


여기서 더 재미있는 포인트는 내가 그렇게 문제집을 풀어대지만 나는 특별히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열등생보다는 우등생 쪽에 더 가까웠지만 공부에 탁월한 재능을 나타내는 다른 아이들이나 혹은 어릴 때부터 신기하게 수학, 과학 영역에서 탁월함을 드러내는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특별하지 않았다. 공부에 대한 특별한 요령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초등학교 시절에는 예체능 학원 이외에 다른 입시 학원을 보내지 않으려고 했던 부모님의 교육 방침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수학 문제집을 그냥 재미있어서 푸는 아이. 그런데도 특별히 공부에 탁월하지도 재능을 보이지도 않는 아이. 공부를 잘하는 요령도 없는 아이. 그게 초등학교 시절 나였다.


그런 내 삶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당시 우리 부모님은 드디어 번듯한 내 집 장만에 성공을 했고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전학 간 학교는 내가 원래 다니던 학교보다는 훨씬 좋은 학교였다. 물론 그래봤자 지방 변두리에 있는 학교였지만 그래도 어른들이 말하는 소위 학군이 조금은 더 좋은 학교였다. 그리고 학교가 바뀌자 내 세상도 달라졌다. 동시에 전학을 가서 처음으로 입시 학원이라는 곳을 다녀보게 되었다. 아무 요령도 없이 그저 문제집을 풀던 내가 학원에 가서 체계적으로 공부를 배우기 시작하고 조금 학군이 나은 곳으로 옮기자 갑자기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단숨에 우등생이 되었고 중학교 배치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하면서 소위 말해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한번 공부 잘하는 아이라는 이미지가 박히자 나는 절대로 그것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깨지 않기 위에 더욱더 성적을 잘 받는 것에 매달렸고 그렇게 적어도 성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중학생 시절이 시작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서는 장래 희망을 적어내라고 했다. 그때 나는 의사라고 적었다.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특별한 동기 부여나 혹은 큰 고민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중학교 1학년 시절 장래희망에 의사라고 적었다는 사실조차 후에 생활기록부를 보고서야 알게 되었으니 정말로 아무 고민 없이 의사라고 적었던 것이 분명하다. 남들이 다 의사가 되기를 지망하는 것 같았고 학부모들의 목표는 자식 의사 만들기인 시대였다. 물론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학부모들의 목표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삶도 남들과 다르지 않게 흘러갈 것 같았다. 이렇게 계속 공부를 잘하면 의대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혹시 못 가더라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남들이 좋다고 하는 공무원, 대기업, 교사 이런 직업을 가지고 그렇게 내 인생을 살 것 같았다.


중 2병이 시작될 무렵에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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