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회사에서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쯤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엔지니어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나는 전력전자 분야에서 최고의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헤매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어느 회사든 탐내는 인재가 되고 싶다. 겨우 밥 먹고 사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그 조직에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일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즐길만한 경지에 이르고 싶다. 내가 가진 가능성을 끝까지 펼쳐서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싶다. 10년, 20년, 30년 심지어 40년이 더 흘렀을 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싶다. 이것들이 내가 바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기 위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주위 엔지니어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주요 관찰 대상들은 오랜 경력을 가진 엔지니어들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경력이 많은 엔지니어라고 하더라도 그 실력이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이었다. 같은 시간 동안 비슷한 분야에서 비슷한 시간을 보내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한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가로 성장하고 다른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조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될까? 그 이유를 알아내야 내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가장 먼저 알게 된 불편한 진실은 바로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 일을 하느냐에 따라 엔지니어의 실력이 갈린다는 사실이었다. 엔지니어가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일이 주어지고 그 환경이 갖춰진 곳이 있는 곳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는 빠르게 성장한다. 하지만 바쁘게 일을 하지만 실제로 실력이 쌓이지 않는, 그 조직을 떠나면 영원히 필요 없는 경쟁력 없는 일을 하는 엔지니어들도 꽤 많다. 이들은 그곳에서 10년을 일하던 20년을 일하던 실력이 늘 수가 없는 일을 맡으며 더 젊은 새로운 사람이 오면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다. 물론 새로운 곳에 다시 취업을 하기도 힘들다. 흔히 말하는 transferable skills이라고 부르는 어딜 가던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면서 동시에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쌓을 수 있는 조직에 속해 있느냐 아니냐가 엔지니어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개인의 노력보다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이 진실은 다소 불편하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결국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좋은 조건의 환경을 찾아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보였다.
두 번째 알게 된 것은 실력이 뛰어난 엔지니어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사유하면서 일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엔지니어가 살아가는 방식에는 두 종류가 있는 것 같았다. 한 가지 방식은 윗사람의 명령에 충성하며 시키는 대로 일하는 방법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 스스로 사유하고 생각하며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것이었다. 첫 번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진정한 엔지니어가 되려 해도 될 수가 없다. 자신의 판단 기준은 상사가, 회사가 내린 명령이며 그 명령에 맞추는 것만이 오늘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식과 기술보다 윗사람의 명령이 앞선다. 이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잘 훈련된 병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스스로 사유하며 살아가는 엔지니어는 어떤 일을 하던 그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목표이다. 다르게 말하면 무언가를 개발할 때 어떻게 해야 내가 최고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혹시 다른 더 좋은 방법은 없을지, 왜 이렇게 동작하는지 끊임없이 사고하고 생각한다. 나의 일에 있어서는 내가 그 주인이 된다. 상사가 요구하지 않아도 자신이 궁금하면 알아보고 찾아본다. 상사가 시키더라도 자신은 다르게 생각한다면 시키는대로 개발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은 살인자가 아니라 자기 머리로 사유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기 머리로 사유하지 않는 엔지니어가 사회적으로 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과 자신의 직업에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뛰어난 엔지니어와 뒤떨어지는 엔지니어의 차이는 바로 일을 즐기면서 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엔지니어들이 실무자로 나이 60이 되어서도 70이 되어서도 일을 한다. 특히나 경험이 중요한 전력전자라는 분야 내에서는 나이 든 엔지니어가 더욱더 우대받는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 실무자가 아니라 관리자가 되는 한국과는 많이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엔지니어가 자신의 일을 30년, 40년을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한 가지 일을 해야 할 때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기 싫지만 참으며 할 수는 없다. 수험생활을 몇 년간 치열하게 하기 싫어도 꾹 참고 해낼 수는 있어도 평생동안 하려면 공부 그 자체를 즐겨야만 한다.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즐기지 않는 일을 수십 년간 열심히 할 수는 없다. 그것처럼 한 분야에서 평생 자신을 갈고닦아야 하는 엔지니어는 결국 자신의 일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 재미있고 궁금하고 신나게 일을 해야 시간이 흘러도 대충대충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일이 나의 도파민을 분비하게 하고 나의 몰입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을 즐기는 태도를 키워야 함을 알게 되었다. 결국 이것은 감정과 관련된 것이았다. 나의 일에 대한 감정을 좋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일에 온전히 몰입하는 시간을 즐기고, 내가 잘못한 것보다는 성취한 것을 생각하며, 기분 좋게 일을 해나가며, 예상치 못한 성취를 이뤘을 때는 마음껏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내가 미국에서 엔지니어를 2년 동안 하면서 어떻게 좋은 엔지니어가 될까에 대한 질문에 스스로 내린 결론이었다. 내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가는 것, 명령에 복종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는 태도, 그리고 일을 즐기는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 이 세 가지가 나에게 필요한 덕목이었다.
이렇게 주위의 엔지니어들을 관찰하면서 어떤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지 생각하면서 그리고 많은 지식들을 배우면서 하루하루 즐거운 회사생활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마치 맑고 평온한 바다에 어마무시한 태풍이 다가오듯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