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부자들은 알고 있는. 가히 가성비 최고다.
또다시 방학이다. 부활절 방학.
스위스 학교들이 방학을 하면 제일 바빠지는 게 항공사라는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방학 전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온 아이들과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는데 친구 누구는 이집트로, 누구는 그리스 섬으로, 누구는 스페인 이비자.. 다들 요이땅! 방학만 해봐라. 노려보고 있었는지 다들 학교 끝나기 무섭게 어디론가 떠난단다. 한시도 허비할 수 없다는 듯이 하교하는 애들을 픽업해서 그대로 떠나려는 가족들로 방학 전 금요일의 학교 주차장은 아이들 데리러 온 SUV 차량으로 가득하다.
우리 가족도 폴란드 부모님을 방문하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길이다.
취리히 공항행 기차 안에서 우리 아이들은 막대사탕을 하나씩 입에 물고 폴란드에 가면 사야 할 쇼핑리스트에 대해서 진지한 토론 중이고(이런 건 어디서 배웠을까? 어머님 잠시 먼산.._) 남편은 한강작가가 쓴 베지테리언 영어판을 뚫어져라 읽고 있다. 한 번씩 내 쪽을 보며 Wow, 이거 하드코어다.라는 멘트를 해가며.
나는 잠시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얼마 전에 파리 여행 중 함께 간 친구가 나에게 말했었다.
본인도 몽상가인데 나와 며칠 지내보니 나도 자주 생각에 잠겨 함께 다니기 편하다고.
내가 그렇구나. 나도 몰랐던 나를 일깨워 주는 친구가 있어 든든하다.
공항에 도착하니 역시나 휴가를 떠나려는 이들로 분주하다. 같은 질문 백만 번 받았을 이 특유의 답답해 죽갔는 표정을 지으며 무심하게 툭 대답하는 공항 직원, 먼 여정의 시작선에서 들뜨고 긴장감도 좀 서린 여행객들, 이 와중에 일 관련으로 이동 중인 듯 보이는 차려입은 솔로 여행객.. 공항은 나에게 설렘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세계의 시민이 된 이후로 뭔지 모를 편안함도 선사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나는 요즘 핫한 내 나라를 굳이 떠나 백인들 속에 흑조를 자처하며 남들과 달라 보이는 아시안도 아니며, 생긴 건 한국인인데 생각과 행동이 유러피언스러운 애매한 아줌마도 아니다. 묻어가는 것 좋아하는 내가 쓱 묻어갈 수 있는 몇 개 안 되는 곳 중의 하나가 공항이다. 그래서 나는 공항이 좋다(놀러 가는 중이기 때문 아님, 삼시 세끼에서 벗어나서 좋아하는 거 아님).
공항의 꽃은 역시 시간 죽이기. 면세점에서 괜히 화장품 쪽 기웃거리며 이거 저거 발라보고 뿌려보고 쓰지도 않을 화장품 구입하기. 고프지도 않은 배에 건강하지도 않은 음식 굳이 사서 넣어주기. 지인들 선물 산답시고 고오급스러워 보이는 쵸코렛 부스에서 200프랑 쓰기.. 재밌지. 과거에 많~이 해봤다. ㅎㅎ
요즘의 나는 공항에서 차 한잔 시키고 앉아 왔다 갔다 하는 사람 관찰하는 걸 즐긴다. 공항이니만큼 전 세계에서 모인 여러 종류의 사람이 모였을 테니,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나지만 (ㅎㅎ 또 뭘 그리 파란만장했다고) 저 사람의 이야기는 뭘까? 무엇이 그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생각하다 보면 사람 하나에 최소 소설 한 권 나올 판이다.
재밌는 것은, 누군가를 관찰하고 그들의 성격과 행동의 근원을 찾아가다 보면 인류에 대해 너그러워진다. 살다가 내 주변에 JS(진상)이 나타나도 저 사람은 왜 저래야만 할까? 내 머릿속 소설의 주인공으로 발탁되는 순간(본인은 발탁된 줄 모름, 출연료 따위 없음) 한 발짝 떨어져 측은지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점심을 먹고선 아이들에게 아이패드로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받는 걸 허락하고는 물음표 귀신들이 조용해진 틈을 타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에 잠긴다. 게이트를 찾아가는 사람들, 시간을 때우러 아이쇼핑하는 사람들, 지나가는 많은 사람 중에서 한 여성이 눈에 띈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진한 갈색머리의 여성. 여성은 식당 입구에서 잠시 대기하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우리 테이블 근처로 와서 앉는다.
뭐지? 왜 이렇게 고급지지?
한 눈에도 무언가 설명하지 못할 "있어 보임"에 매료되었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마침 가까이 자리 잡은 이상 관찰 하지 않을 수 없다(스토커 아니고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사색에 잠긴 듯 멍한 표정을 짓고 고개는 그쪽을 향하여 틈나는 대로 내가 이렇게 느끼는 이유를 찾아본다.
- 얼굴이 예쁜 편이긴 하나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쁨.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안됨
- 보면 뜨아! 할 정도의 명품 아이템 장착 없음. 오히려 로고라고는 그녀가 메고 있던 배낭에 붙어있는 것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나는 본 적 없는 알아보기 힘든 추상적인 무늬임
- 비행을 하기에 편안하지만 너무 운동복 같진 않은 하늘하늘 야들야들한 소재의 풀오버와 바지. 깨끗하고 좋아 보이는 재질. 여기서 1점 획득
- 머리 스타일과 상관없이 깨끗해 보이는 정돈된 머리. 또다시 1점 플러쓰.
오케이, 여기까지는 외관적으로 보이는 특징.
그런데, 뭐 이 정도 이유로 나로 하여금 싸대기 한 대 맞을 위험을 감수해 가며 힐끗힐끗 쳐다보게 했을 리가(매우 드라마틱하다) 없는데? 이 정도는 뭐, 우리 모두 하잖아요?
뭔가 더 있을 거야. 분명히. 더 살펴보자.
그녀가 걸어 들어오던 순간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보는데(이쯤 되면 스토커 인정)
그녀가 식당으로 걸어오던 때의 걸음걸이, 자세가 떠오른다.
아! 그거다!
그녀는 아까 말한 그 브랜드 미상의 배낭을 멘 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그 왜 크리스마스 트리에 다는 오너먼트 위에 달린 줄이 머리에 달려 누가 위에서 당기고 있기라도 하듯 꼿꼿한 자세로 다가와 서 있었다. 가슴을 편채로 어깨는 최대한 내리고 목은 최대한 길게. 그게 인상적이었구나!
자세가 있어뵜던 거구나!
우리 모두 따라 해 보자. 돈도 안 드는데 정말 고급지다!
그 후로도 지켜본 그녀는 앉아있는 자세(의자에 허리를 대고 역시나 꼿꼿하게), 메뉴판을 들고 고르던 자세(꼿꼿하게 앉은 자세 그대로 메뉴판을 살짝 들어 올린. 우리가 옆사람과 성가책을 나눠보며 성가를 부르는 그 자세, 딱 그거다!).. 더 이상 쳐다봤다가는 둘 중 하나 1. 싸대기 아니면 2. 본인에게 관심 있나 생각할까 봐(동성을 좋아하나 세간의 시선을 의식, 할 수 없이 이성과 결혼하여 애도 둘이나 낳았지만 맘에 드는 여성을 보면 여전히 눈이 자꾸 가는 비극의 주인공. 하하 역시 오바는 세계 일등)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는 분명히 식사도 우아하게 했을 것이다.
식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스위스인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식사예절!
아이는 아이다울 자격이 있고, 또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자립심을 키워주는 육아를 중시하는 스위스인들은 자녀들에게 잔소리를 잘하지 않는다. 아니면 스스로가 그런 육아를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밖에 나오면 자제하는 걸지도. 어떤 경우일지라도 평정을 유지하는 걸 높이 사고, 가까운 사이에서도 본인이 아이 때문에 뒷목 잡고 열 올리는 모습(접니다만)을 보여주기 꺼려하는데 식사 시에만 예외다.
입 다물고 씹어.
다 같이 시작해야지.
소리 내면서 먹지 마.
다 먹었어도 앉아있어.
오른손 들고 왼손 들어. 왼손 내리고 오른발 들어. 왼발 내리고 오른손 들어... (이건 그냥 운율상 써봤음)
스위스인들에게서 잘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아이가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할 시에는 다른 이와 대화 중에라도 보이자마자 바로바로 태클에 들어간다.
그래서 그런가 애고 어른이고 식사 시 예절이 몸에 배어있다.
유학시절 진심 쟤 왜 저러니 하는 막 나가던 내 친구 첼리스트 빅토르도, 파티에서 술 진탕 마셔 혀가 꼬이고 목소리 데시벨이 평소의 몇 배나 올라간 친구들도 식사만 했다 하면 애들이 정색을 하고 행동거지를 바로잡는다. 신기했다.
식사 시 금기시되는 행동으로는:
소리 내서 먹기. 입안의 음식물 보이게 씹기.
우리나라로 치면 맛있게 드세요 정도의 덕담을 서로에게 건네며 함께 시작하기도 전에 음식 집어먹기. 식당에서 여러 명이 식사할 때에도 모든 사람의 음식이 나올 때까지 먼저 나온 사람도 음식 앞에 놓고도 먹지 않고 기다림. 내 디쉬가 마지막으로 나오면 가시방석.
영국, 미국 다 다르지만 스위스에서는 식사 시 항상 손이 보이게 식탁에 걸쳐 놓아야 함. 팔꿈치는 또 안됨.
이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
깊이 들어가면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매너 생각하다 체하겠다 싶지만, 그렇지 않게 몸에 밸 수 있게 교육하는 것이 스위스인들에게는 중요한 듯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샤넬백을 들고 벤츠를 타서 나의 클래쓰를 보인다면 스위스인들은 식사 매너를 통해 나의 클래쓰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 건물 위층에 사는 마리아와 그녀의 손녀 5살짜리 키아라를 아파트 입구에서 마주쳤다. 마리아는 60대의 여성으로 아까 내가 공항에서 본 그녀와 같이 자세도 참 바르고 우아한 분이신데, 나긋나긋 조용한 목소리로 은근히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셔서 마주치면 근황토크를 하다 적당한 때를 만나 적절한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떠나는 스킬을 레벨 업시켜 주신 분이다. ㅎㅎ
유치원을 마친 손녀와 나가는 모습이 좋아 보여,
"키아라랑 산책 가나 봐? 날씨도 좋은데 좋겠다. 잘 다녀와."
인사차 건네자,
"응, 시내 카페까지 산책해 가서 아이랑 차 한잔이랑 케이크 먹고 오려고."
" 좋네, 역시 애들은 뭔가 달달한 목표가 있어야 걷는 맛이 있지."
"그것보다도, 내가 좀 가르치려 그래."
"응? 뭘?"
"카페에 가서 주문은 어떻게 하는지, 포크는 어떻게 잡고 케이크를 자르는지. 그런 거 이제 가르쳐야지."
" 아! 너무 좋네. 할머니랑 데이트도 하고 식사예절도 배우고! "
"중요하잖아. 요즘 식당에 가면 애들이 너무 예절들을 몰라. 안 지키는 건 둘째 치고. 라떼는 말이지.."
우아한 그녀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바삐 나가던 때라, 또다시
"옴마야, 난 바빠서 이만"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지만, 이번에는 대화가 끝나는 게 아쉬웠다. 라떼는 어땠는지 정말 궁금했는데..
휴가를 끝내고 폴란드에서 독일을 거쳐 스위스를 오는 비행기를 타러 온 스위스 게이트 앞.
"내가 이상한 건가? 왠지 벌써 스위스 게이트 앞에서부터 뭔가 돈냄새가 나고 사람들이 고급져 보여."
"그렇지? 나도 느꼈어."
남편이 동의한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보다 스위스인들만 모여있는 곳에 가니 뭔가 부내가 난다.
명품옷을 입어서가 아니라 올바른 자세와 여유 있는 몸놀림. 그거다!
켈리백 25 사이즈/앱솜가죽/셀리에/금장 안 사도 있어 보이는 방법이다. (툭 치면 나오는 이 디테일 모른척해주세요). 돈 한 푼도 안 쓰고 부내 나는 방법. 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럼 난 이만 바빠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