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수요일은 스위스 초등학교가 오전 수업만 하는 날이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안 키워봐서 잘 모르지만 일주일 중 유일하게 오전 수업만 있는 하루, 우리나라의 지영이, 준호들은(아닌가? 요즘 애들은 이준이, 이서 뭐 이런 이름인가?) 왠지 하교하자마자 차 안에서 김밥을 먹으며 대치동 학원으로 이동 후 저녁때까지 선행학습을 할 것만 같다. 스위스의 초등학생에게 수요일은 두 번째 토요일 개념인데, 평일에는 오후까지 있는 학교 수업 탓으로 친구들과 놀지 못하는 대신 수요일만큼은 엄마들이 이 친구 저 친구와 계획을 짜 하교 후에 아이들을 집에서 놀린다.
학교에서 시험을 언제 치는지, 수학경시대회가 언제인지는 서로 이렇다 저렇다 대화가 없는 엄마들이 이 수요일을 앞두고는 엄청 분주해진다. 서로 이번 주는 우리 집, 다음 주는 너희 집 돌아가면서 노는 스케줄 짜느라 문자가 바쁘게 오가고, 생일파티도 보통은 수요일에 하기에 반 아이 중에 생일파티를 하는 아이라도 있으면 누가 애들 모아서 데려다주고, 또 파티 끝날 시간쯤에 데리러 가서 집에다 데려다 줄지 톡방이 아주 난리가 난다. 이 서양인 엄마들이 어디 가서 품앗이를 배워왔는지 그렇게 철두철미할 수가 없다(두유노 상부상조?).
오늘은 우리 집에 4학년인 유나 친구 두 명, 유치원생인 수아 친구 한 명이 와서 노는 날. 점심해서 주고 놀리다가 오후 4시쯤 수아와 친구가 있는 테니스 수업으로 두 아이를 밀어 넣고, 큰 애들은 4시 반에 미술 수업으로 데려다주면 나의 임무는 끝난다. 우리 딸들 어깨 으쓱하라고 아침부터 고객님들 잘 노실 수 있게 방도 예쁘게 세팅해 두고, 유나가 특별히 요청한 계란김밥 준비, 바나나 케이크도 구웠다.
화장실 깨끗한가? 쳌
간식 서랍에 간식 충분한가? 쳌
이제 애들 하교할 즈음 밥 시작하고 계란 부쳐서 김밥만 말아주면 된다.
아효, 좀 쉬자.
오랜만에 오전 시간이 한가하여 다이슨 고데기를 꺼내 들었다. 평소에 잘 안 쓰던 하루 5분, 미세전류로 얼굴을 리프팅하는 뷰티 디바이스도 꺼내서 얼굴에 들이대기도 하고. 나중에 테니스 클럽 가서 애들 수업받을 동안 커피 한잔 해야겠다는 큰 그림을 그리며 오랜만에 아이라인도 그렸다. 거울 속에 내 모습이 전성기때와는 비교도 안되지만(우리 모두 맘속의 전성기 다들 있잖아요?) 그래도 뭐, 아직 살아있네. 살아있어.
스스로 사기를 북돋아가며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한다.
12시쯤 되어 창밖을 보니 우리 아이들 포함 여자아이들 5명 부대가 집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오자마자 인사하고 가방 던져 놓고 방으로 들어가는 애들에게 가방이랑 겉옷 잘 걸어 두라는 잔소리 폭탄 한번 날려주고 점심을 챙겨주러 주방 쪽으로 걸어가는데 들리는 아이들 소리,
"우와, 너 메이크업 진짜 많다. 이거 다 너 거야?"
"우리 엄마 것도 있어. 엄마가 안 쓰는 거 나한테 줬어."
(내가 언제 줬냐, 네가 가져갔지..)
뭐 이런 얘기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하며 계란을 부치고 김밥을 말아서 고객님들께 대령하였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며 친구들에게,
"엄마 잘 지내지? 본지 오래됐네. 다음에 엄마랑 같이 놀러 와."
"너네 요즘 학교에서 시험 안 봐? 다음 시험 언제야? "
온갖 쿨한 엄마 포쓰 뿜으며(쿨한 엄마는 시험 얘기 안 하나? ㅎ 쏴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유나가 째려본다.
"엄마, 우리끼리 얘기 좀 하게 해 줘."
눼눼.. 흥칫뿡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하여(I`ll be back) 부엌 정리를 하는 척하며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를 엿듣는다. 친구들 사이에 있는 우리 유나는 적당히 까불고, 적당히 착하고 튀지 않고 맞춰주며 본인을 내세우지도 않는 조화를 중시하는 딱 아시아 여자아이로 보인다. 참 희한하게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우리 아이들은 서양애들에 비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좀 더 소극적인 게 내 눈엔 보인다.
유러피언들은 본인 어필을 참 잘한다.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모두가 알 것 같은 당연한 얘기는 어차피 당연한 얘기니까, 내가 얘기 안 해도 다 알 테니까 하지 말자 주의인데 얘네들은 안 그렇다.
본인이 아는 모든 걸 쏟아내자 주의인지 참 당연한 얘기를 장황하게 하기도 하고, 티를 안낼뿐 다 알고 있는 나에게 친절히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럴때 느낀다.
아,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보는구나.
진정한 고수는 말이 없다.라는 나의 인생 모토에 위배되게 가마니가 되지 않으려면 자꾸 당연한 얘길 당연하게 주저리 주저리 해야 한다. 내 스타일이랑 안 맞아서 기 빨린다.
모르겠다, 지금의 한국은.
나때만 해도 수업시간에 누군가 모두가 알만한 얘길 하면 야유가 쏟아졌었다. 보너스로 선생님 분필이 나의 이마빡을 명중하는 막간 교실올림픽도 각오해야 했다. 유학 시절을 거쳐 이곳에 중, 고등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겪어보니 이곳의 교육 방식이 그런 식으로 각자가 아는 걸 쏟아내는 과정을 거쳐 결론에 도달하기도 하고, 새로운 접근을 통해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거네.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겸손보다는 참여를 알려준다. 당연한 소리 하는 것 들어주고 있으려면 한국 엄마는 속 터질 때도 있지만(많지만) 나 하나 꾹 참고 잘 들어주면 아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에 익숙해지리라, 도 닦는 기분으로(벌칙 아님)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경청해 주려 노력하는 편이다. 집에서 엄마, 아빠에게 존중받으며 자기 의견을 피력한 아이가 사회에 나가서도 토론에 자연스럽게 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다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우리 집에서 아이들 말 경청하기 담당은 토마쓰이다. 시댁 집안 분위기 자체가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집안이라 그런지 아이들과 토론도 즐기며, 삼천포로 빠져서 결론이 이상하게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속상했으니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뭐 이런 식으로) 가끔 엄마가 한계에 도달하여
"지금부터 한 시간 아무도 나한테 말 걸지 마." 폭탄선언을 할 때를 제외 우리 집은 꽤 화기애애하게 본인들의 생각을, 주장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이다.
또 하나 유러피언들이 한국인들과 다른 것.
이들은 무언가를 조금만 해도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겸손의 나라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나는 그게 적응이 안 되었다. 이상했다.
Can you speak English?
이 질문에 한국인의 대부분은 1.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한다.
2. 아주 초큼. 엄지와 검지로 정말 조금이라는 걸 강조하며 배시시 웃는다.
3. 어릴 때 영어권에서 자라거나 유학을 한 경우, 응 이라고 대답은 하지만
우리는 겸손하기에, 내가 영어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뭔가 주저리주저리 읊어야 할 것만 같은 강박에 쌓여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는다.
유러피언의 대부분은 그냥: 응.
하지만 현실은 위의 저 1.2.3번 한국인들의 대부분이 유러피언들보다 영어를 잘한다는 것.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너 수영할 수 있어?
라는 질문에 우리는 머릿속에 드라마 속의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모 쓰고 어깡(어깨 깡패) 스타일로 접영하고 있는 재벌 2세 이사님의 모습을 떠올리는지 어느 정도 수영을 하는 사람도,
잘 못해. 한지 좀 오래됐어.
이렇게 대답한다면,
유러피언들은 또 : 응.
근데 막상 수영장 가 보면 머리 내고 오리 스타일로 동동 떠서 하는 생존 수영 정도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형 물살 가르기 이건 또 아니란 말이다.
뭐지?
아, 우리나라는 질문에 "잘"이 붙는구나?
너 수영 잘해?
너 영어 잘해?
공부 잘해? 좀 잘해?
역시 한국인들의 기대치란 자고로 수영이라 함은 박태환급 정도는 해줘야 어디 가서 나 수영 좀 하네 마네를 논할 수 있는 건가? 그에 비해 유러피언들은 가능성의 유무, can에 집중하니 대답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거구나. 질문의 형태에서부터 기대되는 답이 다르네.
나도 can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들의 접근에 의하면 나는 수영도 영어도, 스키, 테니스도 다 하는 사람이다.
나 수영할 수 있어. 스키도 테니스도! I can do it!
아, 근데 왜 이렇게 양심에 찔리지? 나 잘 못하는디, 더 노력해야 하는디!
수아와 친구를 테니스 클럽에 데려다주고 커피를 한잔 시키는데, 수아 친구 엄마가 다가온다.
"나영, 너 오늘 이쁘다!"
하하.. 오늘 시간이 나서 오랜만에 머리도 좀 말고 찍어 발랐더니 그런가?... 구구절절 변명 장전, 발사 직전에
아니지, 왜 이래. 스탑!
"응,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