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장에서 쓰는 뒤늦은 프롤로그

에디터들과의 만남

by 스위스 아주미

몇 개월 전의 일이다. 남편이 나에게 물어왔다.

" 다음 주에 일 관계로 알게 된 뉴욕의 어떤 부부가 며칠 스위스에 온다는데 같이 만나자."

"응? 알았어."


대답하고는 나의 구글 칼렌더에 점심 약속한 날짜와 시간을 저장하였다.

만나는 이들이 누구인지 내가 왜 나가야 하는지 정도는 결혼 12년 차 부부의 내공으로 그럴만한 일이겠지. 내가 필요한가 보지. 토마쓰를 믿어주는 편이다.


약속한 날이 점점 다가와 궁금해져 물었다.

"그래서, 그 날 만나는 사람들 누구야?"

"뉴욕 타임스의 에디터인데, 몇 번 같이 일해서 알게 되었는데 부인이랑 유럽 여행 중이라 해서 만나자고 했어."


토마쓰가 나를 일 관련 모임에 데려가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뭔가 아직 잘 모르는 사이에서 사적으로 만났지만 남편 입장에서 인싸이트가 되었든 인맥이 되었든 뭔가를 얻을 것이 있는 경우이다. 딱딱할 수 있는 만남에 나를 데려가면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단다.

지성과 미모로 단단히 무장한 나를 데려가서 성공한 사업가 포쓰 뿜뿜 하려는구나!.. 이였으면 참 좋겠지만 그건 내 바램이고 그가 필요한 건 내 안의 개그 자아실현인 것 같다(네, 저 개그 욕심 있어요).


두 번째 이유는, 프로 잔소리러 부인(또 저요)의 의견에 수긍한다는 기쁜 소식인데,

평소에 나는 남편에게 다른 이들과의 식사자리에서 다른 이의 물 잔이 비었을 시에 식탁 밑에서 툭, 와인잔이 비었을 때 또 툭, 상대방 얘기에 훅 끼어드는 남편 그러지 못하게 허벅지 꽉.. 등등 식탁 밑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편인데 특히 우리가 호스트 하는 자리에서 자기 이야기에 심취해 떠벌떠벌 산으로 가는 남편에게 내가 주는 신호이다. 잔소리를 극도로 싫어하는 우리 남편이지만 본인의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어려운 자리에는 꼭 나를 데려간다.


만남의 날을 하루 앞두고 그 에디터라는 Jose에게 이메일이 왔다.


친애하는 나영, 토마쓰에게


나와 아내는 내일 너희들과 만날 시간이 무척 기대가 돼. 만나기 전에 너희에게 얘기해 둘 것이 있어.

아내는 미국으로 돌아가면 허벅지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지금 통증이 꽤 있는 상태야.

솔직히 말하면 그 몸으로 목발 짚고 베니스 운하의 계단을 어떻게 오르락내리락했는지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야.


캐씨는 아는 것도 많고 굉장히 유쾌한 사람인데 지금은 통증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 가끔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기도, 한숨을 쉬기도 하는데 그걸 들어도 모른 척해주면 고맙겠어. 더불어 수술 이야기도 웬만하면 꺼내지 말아 줘.


캐씨의 웹사이트를 둘러볼 수 있게 주소를 보내줄게.


우리의 만남을 고대하며,


Jose


아니, 이런 희대의 사랑꾼이! 아내를 생각하는 Jose의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지고 몸이 불편하다는 캐씨가 짠하기도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전에 어느 정도 사전에 파악을 하고 가는 것은 현대인의 덕목, 그녀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봤는데,

아니? 그녀는 뉴욕에 있는 여러 언론에 수많은 기사를 기고한 프리랜서 작가 겸 기자였다. 지금은 은퇴를 앞두고 있어 작가지망생들을 코치하는 Tutor일도 하고 있었다.


글 쓰는 취미를 가진 나에게 흥미로운 만남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메일을 읽으며 이미 Jose는 내 마음에 합격! 호의적으로 다가왔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특히 사업을 하는 남편 일과 관련된 사람일 때 나는 옷차림에 신경을 쓴다. 옷차림은 많은 메시지를 전하는 전략이다!


남편이 하는 포토 매거진 편집장 일로는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정말로 편안한 캐주얼 차림의 포토그래퍼들부터 조금은 더 차려입는 아트 갤러리스트, 아버지가 하던 유럽에서 권위 있는 갤러리를 이어받아 운영하던 샤넬로 무장한 화려했던 그녀 그리고 아트 바이어들.. 등등이 그들이다.


만남의 목적과 상관없이 대체로 그 자리에 나올 여자사람의 평소 옷차림을 염두에 두고, 서로가 너무 대조되지 않을 정도의 옷차림을 선택한다. 그렇지 않은가, 상대방이 청바지에 운동화 신고 나오는데 내가 너무 뻗쳐 입고 나가면 서로 간의 거리가 좁혀지기가 힘들다. 이런 나를 두고 오바라고 하는 토마쓰도 은근히 내가 이 옷 저 옷 꺼내서 전략을 짜는 걸 재밌어한다.


웹사이트 사진에 본 캐씨는 편안한 옷차림의 모습이었고, 지금 여행 중인 데다가 몸도 안 좋으니 편안한 차림으로 나올 게 분명했다. 나도 남편도 너무 차려입지 않은 편안한 차림에 그래도 일 관련 만나는 사이니께 단정한 신발 정도만 신어주고 나갔다.


예상대로 Jose(호세)와 캐씨는 유쾌하고도 따뜻한 사람들로 오랫동안 New York Times에서 일하며 겪었던 일, 보아 왔던 사건들 등을 이야기해 줬는데 그중에서도 9.11 사건이 인상에 남았다.

뉴요커로서 자기 인생 통틀어 가장 힘든 시기였다며, 통신이 끊어져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던 그 반나절이 자기 생애 가장 긴 반나절이라 했다.


Jose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많은 순간들에 각국의 대통령들과 한방 안에서 그들의 사진을 찍고, 신문 기사로 냈었는데, 토마쓰의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폴란드인에게 크나큰 사건 중 하나인 바웬사 대통령이 미국의 부시 대통령에게 공산 통치에 맞서 싸운 자유를 상징하는 메달을 수여받는 현장에도 본인이 있었으며, 직접 찍은 사진을 우리 아버님께 보내드렸다 한다. 그 사진을 받아보신 우리 아버님, 또 감동하셔서 눈물 한 방울 찔끔하셨을 거다.

22593C3E-86EF-413C-80C4-A34E799A0597.heic 폴란드의 Lech Wałęsa 대통령이 미국의 Bush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메달을 수여받은 순간

한참 맛있는 식사와 더불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다 Jose가 정색을 하며 포크를 놓더니 말했다.


"토마쓰, 내가 어떻게 도움이 되어 줄까?"

미국인 특유의 돌직구. 나는 속으로 흠칫했다.

나중에 남편에게 듣기로 Jose 가 남편과 남편이 운영하는 포토 매거진을 좋아하고, 그 계통에 적절한 이들과 연결도 시켜주고 도움이 되어 주고 싶어 한단다. 참 고맙다.


캐씨가 나한테 속삭인다.

"우리 젠틀맨들 일얘기 좀 하게 둘까? 너에 대해서 얘기해 줘. 스위스는 언제 온 거야?"

나는 바이올린을 유학하다 남편을 만나 스위스에 왔으며 여기서 하는 일을 잠시 구구절절 이야기하다 수줍게 고백했다.


"나 사실은 어제 너 웹사이트 살펴봤어. 글 쓰는 이들의 코칭을 하더라? 나도 사실은 취미로 글을 쓰고 있어."

갑자기 캐씨의 얼굴이 환해진다. 본인에 대해 사전 조사를 하고 나온 것도 반가운 눈치인데 더구나 내가 글을 쓴다 하니 갑자기 내적 친밀감 수직 상승한 모양이다.


" 어떤 글을 쓰는데? 내가 볼 수 있어?"

"볼 수는 있는데 한국어로 써. ㅎㅎ "


나의 글의 주제와 성격, 또 앞으로 구상하고 있는 몇 가지를 이야기하니 물어본다.

"오늘 우리 만난 것도 쓸 거야? 링크 보내줘. 구글 번역기에 돌려보게."

" 하핫. 오늘 우리의 만남에 대해 써도 될까? 사진도? "

"그럼! 나도 물어보려 했어. 사진 올려도 되는지. "


그렇게 우리는 쌍방 실명, 얼굴 노출 허가조약을 맺고는 내가 평소 궁금하던 질문을 했다.

"내 글은 수필의 성격의 글로, 경험했던 일이 주가 되다 보니 내 주변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까?"

"어떤 내용인가에 따라 다른데 글 발행하기 전에 관련인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게 좋아. 특히 실명을 쓸 경우, 민감한 주제를 쓸 때는 필수로. "

"응, 지금까지는 그렇게 했어. 읽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더 신경 쓰이더라고. 말조심도 하게 되고."

"몇 명이 읽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조회수를 말해줬더니 놀란다. (그래요, 저 조회수 나쁘지 않아요. ㅎㅎ)

"내가 해 줄 이야기가 없겠는데? 너는 이미 작가야."

아이, 부끄럽게.


그녀는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동시에 몇 가지의 팁, 궁금했던 몇 가지도 대답해 주었다.

Creative people

창의적인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은데, 남편과 나는 뭔가를 아이디어를 짜서 만들어내고, 글을 쓰고, 음악을 연주하고, 사진 작품을 창조해내지 않으면 온몸이 쑤시는 사람들이다. 창의적인 사람들의 특징은 본인의 머릿속의 생각과 영감들을 정리하느라 남에게 관심이 없지만, 한 번씩 이렇게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면 '앗, 당신도 나와 같은 과군요.' 반가운 동시에 많은 영감을 얻는다.


이렇게 받은 영감으로 동시대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그들과 조금 동떨어진 곳에서 사는 어떤 아주미가 따뜻하고도 용기가 되는 글을 쓰겠다는 각오로 이번 브런치북을 시작하려 한다.


2025년 3월 1일

삼일절에 스위스 알프스 어느 산 위에서,

스위스 아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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