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 언니 설명서
나는 성격이 내향형임에도 불구하고 아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 많은 아는 사람들 중에 내 사람이 되는 사람은 드물다. 어른 사람과 어른 사람이, 그것도 가족이 있는 주부님들이 친구가 되어 정기적으로 만난다는 건 그 어쩌다 한 번 생긴다는 자유부인 타임을 할애할, 할 일이 5조 5억만 개도 넘는 아주미들이 운동도, 쇼핑도, 아니면 그냥 가만히 누워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드라마 한 편 때리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찬스를 포기한다는 것이기에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아쉽게도 웬만해선 이어지지도, 깊어지지도 않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 와중에 친구의 소개로 만난 우아한 그녀.
첫 만남에서부터 뛰어나게 스타일리시한 외모와 학식과 교양을 갖춘 그녀의 언행이며 세련된 매너이며 나는 그녀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어릴 때부터 중고등학생이 되어서까지 나는 잘생기고 멋진 학교 오빠들보다 예쁘고 공부 잘하는 언니들에 많이 매료되었었다. 지금도 길을 걷다 예쁜 여성이 있으면 눈이 절로 간다.
옷이 예쁜데, 뭐지?
오, 신발을 저런 걸 매치하니 예쁘네.
뭐 이런 생각을 혼자서 하기도, 옆에 남편이 있으면 코멘트를 하기도 하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낯선 남자는 안 훑어봐서 참 다행이라던 토마쓰가 뒤늦게 깨달음이 왔는지 다른 쪽으로 자기 걱정해야 하는 거냐며.. ㅎㅎ (응, 많이 해).
나와 취향도 비슷하고, 사회, 경제, 미술 전반을 아우르는 지식도 풍부한 그녀 옆에 있으며 얻어듣는 것도 많아서 함께 있으면 즐거운 데다 나이대가 비슷한 딸 둘을 키우는 엄마라는 공통분모로 우리는 천천히, 그렇지만 꽤 친한 친구가 되었다. 파티를 여는 걸 좋아하는 친구 덕분에 이 친구의 친구들과도 알게 되었고, 딸들은 딸들대로 엄마들은 엄마들대로 만남이 기대되는 즐거운 모임이다.
이 친구는 본인의 삶에 대한 기준이 매우 높다. 하는 일에서나 만나는 사람에 있어서나 최선을 다 하고 어떤 의미에서든 자신이 성장하는데 몰두하는 사람으로 현실에 안주하는 성격이 강한 나로서는 옆에서 자극도 되고 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열중하는 계기가 되는 친구이다.
우아한 그녀와 함께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처럼 위트 있고 활기찬 사람들인데 다들 포쓰들이 장난이 아니다. 재밌는 건, 난 나 자신을 센 언니가 장래희망인 쑥쓰럼쟁이 아시안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남편이나 사루비아님 말로는 너도 결코 뒤지지 않아. 라니 그동안 내공이 많이 쌓였나 보다.
내가 전 글들에서도 나열한 유러피언들의 매너, 식사 시 주의 사항, 등을 읽고서
오, 저 아주미 뭘 좀 아는데? 아주미, 너 뭐 돼?
라고 혹시 생각했으면 땡! 그 정반대다.
오히려 평소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부족하다고 생각하기도 해서 더 관심이 가고 눈여겨보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예절 교육을 그래도 받고 자란 전직 참한 규수출신으로서 유럽에 살면서 문득문득,
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행동이 고장 나는 순간이 있는데, 예를 들면 이런 순간이다.
우아한 그녀와 딸들과 함께 오후에 차 한잔 하러 만나기로 한 어느 주말. 그녀가 소개해주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며 같이 만나자고 했고 나도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녀와 만나기로 한 루체른 시내의 5성 호텔에 도착해 약속 장소에 가보니, 이미 그녀들은 샴페인 한 병을 시켜서(센 언니들은 샴페인은 병으로 시킴, 밑줄 쫙) 마시고 있었고 나도 합류해 우리는 아이 7명에게 간식시켜 주고 게임 가져다줘가며 그 와중에 샴페인 한 병 추가, 즐거운 주말 오후 티타임을 보냈다(티타임인데 티를 안 마신건 모른 척해주세요).
계산할 순간이 왔고, 연세가 지긋하신 슈트를 입은 신사 한 분이 계산서를 들고 왔다.
그중 한 명이 샴페인은 자기가 낼 테니 그 나머지 너네가 알아서 내라고 제안을 했다. 또 한 명이 발 빠르게 애들 먹은 간식을 그럼 자기가 내겠다고 얘기한다. 앗! 내가 이런 거로 어버버 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한국에서는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계산하기 스킬도 곧잘 들어갔던 나인데 워낙 스위스에서 더치 페이 문화에 익숙해져 있어서 넋 놓고 있다가 처음 보는 언니야들한테 얻어먹게 생겨버렸다!
넌 그럼, 처음 우리 모임에 왔으니 오늘은 네가 팁만 내줘.
그중 호탕한 한 그녀가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응, 알았어. 샴페인 잘 마셨어. 고마워.
여기서는 네가 내네, 내가 내네, 계산대 앞에서 요란스레 싸우다 지갑 빼앗아갔다 카드 돌려줬다 왔다 갔다 하는 시끄러운 상황은 벌린 자만 창피해 지므로 빠르게 패배(?)를 인정, 깔끔한 감사 인사 후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사를 하고, 지갑을 보니 다행히 빳빳한 20프랑짜리 지폐가 있다.
'근데... 이걸 어떻게 건네주지?'
순간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오갔다. 팁에 대해 내가 받은 교육은 엄마, 아빠가 늘 얘기하던 호텔에서 자고 방에서 나갈 때 청소해 주는 이를 위해 얼마라도 책상에 두고 나오라는 것과, 한국에서 식사 시 우리를 위해 고기를 맡아서 구워주는 이나 코쓰요리처럼 뻔질나게 우리 방을 드나드는 연세 있으신 분에게 아빠가 주시던 빳빳한 지폐가 다였다.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우리가 드리면 건방져 보일 수도 있으니 아빠가 늘 도맡아 하시던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식사 시에 식사가격에 팁을 포함해서 계산해 버리기에 내 인생에 누군가에게 팁을 건넬 일은 잘 없었다.
앞선 그녀들의 카드 계산이 끝나고 내 차례가 되었다.
어떡하지? 접어서 드릴까? 지폐는 원래 봉투에 넣어서 주는 건데. 접지 말고 편채로 줄까?
건방져 보이면 어떡하지? 두 손으로 드려야 하나?
그 1초 사이에 머리에서 온갖 생각들이 아주 난리가 났다.
이 생각들이 미처 정리되지 않은 채 난 오른손으로 빳빳한 20프랑짜리를 펴서 들고 왼손으로는 오른 손목을 어정쩡하게 받쳐(왼손을 거들뿐) 그 와중에 또 쿨한 척은 해가며 팁을 줬다. 아오!
그 뒤로 언젠가 우아한 그녀와 크리스마스를 맞아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보고 차를 마시러 갔는데, 그때는 나도 배운 대로 얼른 계산서를 집어 들며,
저번에 너희가 많이 냈으니까 이건 내가 낼께. 팁은 네가 주렴.
온갖 쿨한 척을 하며 말했다.
계산을 하고 나서, 그녀가 팁을 어떻게 주는지 안보는 척하며 한눈으로 보고 있는데(사실은 온통 신경이 그리로 쏠려있었다! 쿨하긴 뭘 쿨하냐! 아오, 동네 사람들!), 그녀는 지갑에서 10프랑짜리를 꺼내 4분의 1로 접은 후 손안에 가지고 있다 나의 계산이 끝난 후 모나리자 미소를 짓고 다시 한번 땡큐를 날려주며 웨이터에게 악수를 청하듯이 손을 내밀어 지폐가 보이지 않게 건네주었다.
아! 저렇게 주면 되는구나!
그러고 보니 우리 남편이 호텔에서 서비스를 받으면 잘하던 행동이다. 내가 뭘 해봤어야지. ㅎㅎㅎ
팁을 줄 때는 접어서 안 보이게 건넨다, 밑줄 쫙.
이렇게 또 하나 배운다. 인생은 배움의 연속.
그래서, 우아한 그녀가 땅에 떨어트린 열쇠를 어떻게 주웠냐고?
정답은, 줍지 않는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함께 테니스 레슨을 받았었는데, 레슨이 끝난 후 나와 테니스 코치와 다음 일정을 짤 때 일이었다. 그녀가 핸드폰과 차 열쇠, 라켓 등을 들고 있다 열쇠를 떨어트렸다. 열쇠를 떨어트린걸 눈으로 확인한 그녀는 다시 핸드폰에 일정을 입력하는 일에 집중했고, 결국은 같이 있던 남자 코치가 열쇠를 주워주었다.
오호, 저런 방법이!
이게 맞는지 틀린 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놀라지 않는 모습이, 0.1초 만에 재깍 줍지 않는 여유가 새롭게 다가왔다.
오케이, 알았어. 궂은일은 젠틀맨에게, 우리는 레이디니까. 밑줄 쫙
예상 부작용: 아무도 주워주지 않음, 성급한 한국인 못 참고 후다닥 주워버리든가 안 줍고 기다리는 동안 답답해 미쳐버리기..등등.
이것도 원래 하던 사람이 해야지 어설프게 흉내 냈다가 공주병이나 왕싸가지로 찍힐지도 모르니 이번만은 아주미 말 믿지 말고 알아서들 하라는 무책임한 당부를 끝으로 난 바빠서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