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인들의 귀여운 허세
이 집 아주미가 요즘 바람이 났다. 매일 오후 5시경 시원한 물속에서 숨을 할딱거리며 심장이 터질 때까지 온몸에 긴장과 완화를 반복하며 한계를 향해 앞으로 앞으로 조금만 더..
동네 수영장과 바람이 났다.
수영 레일을 5번 왔다 갔다 하면 내 귀에 심장소리가 들릴 정도로 숨이 차다. 숨은 찬데 해방감에 온몸이 뇌까지 시원하다. 하루 중 유일하게 내 머릿속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나의 최측근들 중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네 글을 읽고 있으면 너의 목소리가 음성지원 되는 것 같아.
나도 그렇다.
머릿속의 수많은 생각들이 의식의 흐름대로 자유롭게 떠돌다 어느 시점이 되면 정리되어 머릿속의 나레이션이 되어 들리는 순간이 있는데(머릿속 그놈 목소리) 그러면 아, 글을 쓸 때가 되었구나 깨닫는 순간이다.
요즘 이 목소리의 흐름을 2초에 한번 끊는 두 소녀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윤라헬, 윤아멜리로 여름 방학을 맞은 스위스 초딩 4학년, 유치원생이다.
나의 머릿속 목소리가 분위기 잡고 독백 한번 갬성있게 할라치면,
"엄마, 배고파."
재밌었던 일화를 개그 섞어 풀라치면,
"엄마, 봐봐. 내가 한 거 봐봐."
"엄마, 휴지 갖다 줘."
"엄마, 재밌는 얘기 해줄게."
"엄마, 같이 영화 보자."
"엄마, 또 배고파."
"엄마, 심심해."
"엄마, 여기 아야 했어."
(내 안의 목소리 핵당황)
안 그래도 정신없는 아주미, 머릿속의 흐름까지 툭툭 끊기니 오후쯤 되면 정신이 혼미, 어질어질하다.
그래서 정한 나의 여름 방학 탈출구, 수영장이다.
아이들 더 어릴 때는 그 탈출구가 우리 집 화장실이었으니, 많이 업그레이드된 건가? (호캉스보단 역시 화캉스)
혼자 수영을 하며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생각을 정리하는 물속에서의 시간이 너무 좋다.
소리에 예민한 음악인이(자꾸만 까먹는 나의 아이덴티티 중 하나) 하루종일 귀에 대고 쫑알거리는 아이들과 함께하려니 물속의 이 고요함이 나를 치유하는 것만 같다.
오해는 하지 마시길. 나는 우리 아이들을 옴총 사랑한다. 방학에 이 아이들과 휴가도 가고, 함께 수영도 하고,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도란도란하며 보내는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하다... 그리고 넘나 힘들다...!!!! (아오, 동네 사람들!) 신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때는 꼭 그것의 대가를 치르게 하시니, 인생사 사람 사는 거 다 공평하고 퉁이지 싶다.
나는 원래 수영을 못했었다. 어렸을 때 나의 친언니는 수영, 발레, 미술, 피아노, 서예도 했었던가? 취미 부자로 키우고 싶으셨는지, 적성 계발이 목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원 가방을 들고나갔다 돌아와 다른 학원 가방을 들고나가는 취미 사교육의 최고봉을 찍었었고, 나는 그 옆에서 그녀가 왔다리갔다리 하는 걸 구경했었다.
오늘은 어디가? 체크하며 학원 가방을 챙겨주기도 했고, 던져둔 언니의 가방을 뒤져 내 몸에 큰 발레복을 입고 숏다리를 뻗어보기도, 언니의 피아노 가방에서 꺼낸 악보로 독학으로 그녀보다 더 빨리 곡을 배워 외워서 치기도 했다(유일하게 언니보다 내가 잘하는 것 ㅎㅎ). 최근에 언니가 제보한 바로는 내가 어릴 때 수영복 젖을까 봐 물에 안 들어가려 했다니 참 나도 알 수 없는 정신세계다.
그러다 20대 후반에 간 당시 남친, 현 남편 토마쓰와의 이태리 여행. 이태리 작은 마을 Mergozzo라는 곳에서 보트를 빌려 호수에서 몰았는데 토마쓰가 갑자기 더워서 물에 좀 들어갔다 와야겠다며 물로 뛰어드는 게 아닌가?! 우와! 영화에서 보던 장면처럼 얼굴만 내놓고 둥둥 떠다니는 토마쓰가 너무 자유로워 보이고 부러웠다.
난 비키니는 폼으로 입고 갔지 수영을 할 줄 몰라 뜻밖의 보트지킴이로 자진해 토마쓰 수영하는 걸 바라보기만 했었다. 아오, 나는 수영 하나 안 배우고 뭐 했나! 생각하면서..
시간이 흘러 라헬 임신했을 때 만삭의 몸으로 여름을 나려니 너무 덥고 몸이 무거워서 수영장을 가 보았었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에 들어가 유러피언들이 하는 스타일로 고개를 내고 물에 몸을 기댔는데,
어? 뜨네?!
그동안 본 게 있어서인지, 라헬이 뱃속에서 튜브역할을 했던 것인지 분명 나는 수영을 못했었는데 수영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여름이면 수영장에 가서 시원하게 수영하는 재미에 푹 빠졌는데 현지인들처럼 호수에서 수영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벌레도 무섭고 작은 물고기라도 다리에 닿으면 허걱 기절초풍에 유유히 지나가는 오리 꽥꽥 보고 엄마야! 내가 깨꼬닥 넘어갈 것 같았다(오리 둥절). 나는 누가 뭐래도 사방이 콘크리트로 꽉 막힌 공간에 들어가 있을 때 마음의 안정감을 느끼는 서울녀자인데 드넓은 자연에서, 만년설이 녹은 물에서 수영이라.. 하하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스위스가 선진국이구나 느끼는 많은 요소 중의 하나가 대부분의 학교에서 수영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다. (쓰고 나서 한국도 그런가 싶어 찾아보니 역시! 한국도 이제 의무교육이란다. 대~한민국! 그렇지만 라떼는 아니었다는 점) 호수나 바다에서 수영하는 문화가 있는 유럽에서 수영을 못한다는 건 생명이 위험해지는 것과 직결되는 것이기에 어린 시절부터 수영은 필수이고, 만 7세가량까지 수영 레슨이 커버되는 의료보험 상품도 많다.
외국 영화에서 많이 봤을 것이다. 호수에서 머리만 내놓고 옆의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한가로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의 유러피언들을. 자연히 남녀노소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렵고, 우리가 생각하는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잘생긴 대표님이 호텔수영장에서 수영모쓰고 카리스마 있게 자유형, 접영 자유자재로 뽐내는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지나가는 오리와 속도가 별반 차이 나지 않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세월아 네월아 둥둥 떠다니며 별 힘들이지 않고 하는 그런 생존 수영 스타일이다. 그런 그들의 얼굴 표정이 대단히 만족스럽고 행복해 보이니 여름철의 수영이 인간의 삶의 질을 한 단계쯤 높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오늘의 교훈: 수영은 어렸을 때, 혹은 임신했을 때 배워놓자..?
지난 주말에는 루체른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호숫가 주변을 산책하고 있는데, 띠링 문자가 왔다.
누구지? 확인해 보니 여러분들도 아시는 나의 친구 Andrea가 어디선가 산책하고 있는 우리 가족을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Andrea가 누구여? 하시는 분들을 위해: https://brunch.co.kr/@swissajumi/13)
응? 어디 있지?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Andrea 가 호수 위 보트에서 힘차게 손을 흔든다. 그녀의 부모님과 라헬과 친하게 지내던 딸과 함께. 반갑게 손을 흔들고 먼 거리에서 루체른 시내 사람들 다 들리게 서로 근황토크 샤우팅 해주고 조만간의 만남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스위스에서 본인들을 "Upper middle class" (상위 중산 계급)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집 사고, 차 사고 그러고 나서 사는 게 있는데 그건 바로 보트. 우리 이웃들도 한동안 다들 보트, 그것도 몇몇 집은 sailing boat(돛단배?) 붐이 일어 여기저기서 면허 시험공부를 서울대가 목표인 고3 마냥 했었다. 옆에서 지켜본 바로 이 보트 면허라는 게 한번 딴다고 그만이 아니라 일 년에 지정된 기간만큼 꼭 주행을 해 줘야 해서 우리 윗집 Stefan&Flo도 때 되면 그리스로, 스페인으로 주행겸 휴가를 떠나곤 한다.
보트를 살 예정인 사람들이 공통으로 구시렁거리는 불만사항이 있는데, 바로 호숫가에 배를 정박해 둘 장소가 턱없이 부족하고, 장소 하나 예약해 두면 몇 년이 지나 운이 좋아야 차례가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정박비가 많이 드는 것에 비해 해가 나는 날은 많지 않아 일 년에 몇 번 안 나가게 된다는 이야기, 여름에 해 나는 날 다른 곳에 가고 싶어도 배에 들어가는 돈 본전 생각에 할 수 없이 배 타고 나간다는 이야기.. 등등 좋은 점보다는 불만사항이 많은데도 배를 사서 해 좋은 날 타고 나가는 것 보면, 이 어려운걸 내가 합니다 귀찮은 일이 많아도 막상 나가면 좋고 보상되는 그 어떤 것이 있는 게 분명하다. 마치 내가 스키 타러 갈 때 준비 단계에서 투덜투덜 내가 미쳤지, 이 짓을 또 하네 구시렁거리다가도 막상 슬로프 올라가면 오길 잘했다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남편 말로는 Rich people problems 란다. ㅎㅎ
호숫가에서 만난 60대 이웃의 말로는, 자기도 예전에 배가 있었는데 별로 타지도 않고 신경 쓸 일은 많아서 팔아버렸단다. 그 아저씨는 배를 소유한다는 걸 어떤 사회적인 지위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서 굳이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단다. 젊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 꿈꾸기 시작해 어느 정도 자리 잡으면 무리해서라도 사는데, 자기 나이정도 되면 의미 없다는 걸 깨닫고 팔아버린다고. 그러면 배를 소유했다는 건 부자임을 드러내는 걸 부끄러워하는 스위스인들이 할 수 있는 소극적 돈자랑의 최대치인 것인가? ㅎㅎㅎ 스위스인들 참 귀엽다. 물론, 이건 중산층(아니지, 본인들이 상위 중산 계급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국한된 이야기이고 그보다 더 부유층은 내가 봤을 때 허세라기보다는 그냥 태어나보니 배가 있었다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려는 수단보다는 그저 자동차를 소유한 정도의 의미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뭐가 얼마나 좋은지 한 번 따라가 볼까나?
친한 친구 커플 중에 모터보트를 소유한 친구와 무더운 여름날 루체른 호수에 나가 보았다.
가져간 차가운 샴페인을 한잔씩 들고 만년설이 덮여있는 알프스산을 배경으로 햇살에 반짝이는 물을 가르며 속도를 쫙 내서 달리는 배 안에서 나는
아, 스위스 살기 잘했다
잠시나마 국적을 바꿔볼까 생각을 했으니 얼마나 좋은지 짐작하겠는가?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조용한 곳에서 모터시동을 끄고 호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수영을 했을 때이다.
그렇게 부러워하던 호수에서 유러피언 스타일로 고개 내고 동동 떠다 나기(a.k.a 개헤엄)를 드디어 내가 해냈다! 소리 질러!
여름철 수영이 행복지수를 높여줬다면 배를 탄 후 호수 한가운데에서 뛰어내려하는 수영은 행복지수를 폭발시켰다.
이날 이후로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라헬 아부지는 모르는 목표.
토마쓰 눈 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