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요즘도 인종차별하는 사람이 있니? 뭘 모르시는구나?
지난주에 20년 넘게 유럽에 살면서 처음으로 진귀한 광경을 목격했다.
바로 인. 종. 차. 별. 주. 의. 자
사실, 나는 이곳에서 인종차별하는 이를 접한 일이 드물고 누군가가 나를 인종차별한다고 하기가 마치 나 자신에게 약자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것 같아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편이다. 소수민족의 마지막 자존심이랄까? ㅎㅎ
손에 꼽히는 몇 번의 이게 인종차별이구나 하는 몇 가지 사례들이 있는데 대부분은 그들이 나를 인종차별하지 않았어도 굳이 어울리거나 엮이고 싶지 않았을 부류의 사람들이라 너 삶이 힘들구나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마음속으로 역차별 한번 세게 해 주고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유쾌한 한국인 지인들과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 루체른 시내에서 피트니스와 사우나를 즐기던 날이었다.
이 피트니스 센터는 루체른 한복판에 자리한 곳으로 평일에 가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현지인 아주머니 부대를 만날 수 있다.
운동하는 녀자들 기분 물씬 내며 피트니스센터에서 좀 뛰어주고, 수영장에서 이곳 사람들처럼 개구리스타일 생존수영도 30분 즐기고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사우나로 갔다(사실은 이거 하러 온 거임).
족욕을 하는 코너에서 한 지인과 물을 받아서 발을 담그고 오손도손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70대 정도로 보이는 한 스위스 여성이 우리 옆으로 지나가면서 우리 뒤에 있던 선반에 자신의 물건을 챙기려다 가지고 있던 수건을 나의 지인이 앉아있는 의자에 걸쳐두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야기하느라 이 여성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걸쳐둔 그녀의 옷을 피해 앉느라 나와 동행한 그녀는 삐딱하게 앉아있었고 잠깐만, 내가 왜 이렇게 앉아있지? 순간 의문이 든 그녀는 나에게 불편함을 토로했다.
그때, 그녀가 의미하는 바를 바디랭귀지로 알아들었는지, 스위스 여성이 자기 옷가지를 챙기더니 우리 쪽을 노려 보며 잠깐 멈춰 서서 말했다.
"찡찡쨍쫑 칭칭칭."
......... 응? 이게 무슨?.....
처음 당해보는 일에 잠시 뇌가 고장이 났는지 순간 얼음이 되었다.
나의 인생 지론 좋은 게 좋은 거다,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에 도전장을 내민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지적한 이에게 어떻게라도 공격을 하고 싶은데, 보아하니 동양인이네? 이거다! 하며 동양인 비하하는 방법 중 자기가 아는 최대치인 쨍쨍쫑을 시전 한 것이다. 아주머니, 그거 이미 옛날 거예요. 뭘 모르시는구나.
별로 싸우고 싶은 마음도, 말 섞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지금 당신이 하는 발언이 그렇게 지적이고 우아하지 않다는 것은 한번 짚어주고 싶었다.
"그거 지금 우리한테 한 말이야?"
최대한 낮게 깐 목소리로 조용하고 우아하게 물었다(이게 중요, 다들 밑줄 쫙. 이들의 무식한 발언에 열폭하기보다는 나는 지성인, 네가 지금 미개한 거야. 우위에 서서 얘기하는 기세가 중요하다! 우아한 기세!).
동양인 관광객이라 생각했던 우리가 독일어로 물어보니 그년는 흠칫했다(앗, 그년은 오타입니다! 일단 패스).
5초 정도를 가만히 있던 그녀는 유럽인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잘하는 입술을 오므리고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래 맞아!"
내가 표정으로 왠열, 무식한 할머니 좀 보소. 메시지를 전하니,
(이 표정 어떻게 하느냐 하면 눈썹을 좀 올려주고 재밌네? 하듯이 살짝 미소를 머금어 주면 됨.)
자기도 뭔가 꿀리는지 서둘러 물건을 챙겨 쫓기듯이 나가려다 다시 한번 멈춰 서서 우리를 향해 말했다.
"찡쨍쫑찡쨍쫑쫑쫑."
아, 이 할매 마지막 자존심이니? ㅋㅋㅋ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데? 다시 한번 말해줄래?"
여전히 나는 언성을 높이지 않고, 나는 지성인이다. 분위기를 잃지 않으며 말했다.
"나도 모른다 이것아!" (이것아! 는 왠지 문맥상 이 할머니가 했을법해서 써봤음)
그녀가 서둘러 사우나를 나가며 말했다. 쫓기듯이 나가면서도 뭔가 억울했는지,
"좋은 하루 보내!"
끝까지 할 말은 하고 허둥지둥 나간다.
(숨은 뜻: 난 지금 도망가는 게 아니다. 체면 차리고 할 말 다 하고 나가는 것이다, 이것들아.)
그런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응, 고마워. 너도!"라고 나도 지지 않고 말했다.
(숨은 뜻: 너의 그런 발언 따위 내 하루를 망치지 않아. 뷁!)
나름 신경전을 벌이고 나니 뒤늦게 마음이 격양되었다.
웬일이니, 저 할매.
그제야 같이 있던 친구한테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물으니,
친구가 자기 의자에 저 할머니가 옷을 걸쳐두었는데 자기가 불편해서 그런 티를 낸 것이 저 할머니가 기분이 나빴나 보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그래, 자기가 수건 좀 잠깐 걸쳐두었다고 싫은 내색을 한 게 그 할머니 입장에서는 기분 나빴을 수도 있겠네. 그렇다고 쨍쨍쫑 드립은 아니지.
집에 와서 그날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설명했다.
참고로 우리 남편은 일터에서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피해자 코스프레 하며 본인의 노력 없이 모든 걸 상황탓하는 이들을 많이 봐와서 그런지 그런 이들을 victim of their own lives 라며 인종차별하는 자들과 동급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That lady was 오바."
내가 맨날 오바야, 오바 거리니 그 단어를 알아서 시기적절하게 써먹는 우리 남편. ㅋㅋ
"그치? 이런 경우에 어떤 말을 해주면 그 사람 레벨로 안 떨어지면서 지능적으로 무안을 줄 수 있을까?"
"경찰에 신고한다 그래."
"아냐, 그보다 좀 더 우위에 서서 깔아뭉개주는 무언가가 필요해."
"이렇게 말해봐. Ihre Aussage könnte rechtliche konsequenzen verursachen."
번역하면 당신의 발언에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 뭐 이런 얘기다.
"오, 괜찮은데?"
내가 열폭하지 않으면서 당신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는 걸 짚어줄 수 있는 좋은 문장이다.
"그래서, 실제로 그래? 법적인 책임 물을 수 있어?"
"그건 모르지. 일단 겁 팍 주는 거지."
"아. ㅎㅎ 오키."
이 문장을 되뇌어보는데, 이노무 독일어. 중요한 순간에 혀 꼬인다. 일단 저장.
나도 내가 이렇게 쌈닭이 될 줄은 몰랐지. 갈등을 좋아하지 않던 나는 유럽사는 한국 아줌마 신분이 되면서 달라졌다. 누가 봐도 이 동네 사람은 아닌 눈에 띄는 나의 외모 덕에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특별할" 수는 있다. 이리 애매모호하게 말하는 이유는 그 태도가 부정적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아서이고(약자가 되기를 거부하겠소! ) 혹시나 부정적일 경우라도 그게 인종차별인지 그냥 이상한 놈이 이상한 행동을 한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인데, 그만큼 인종차별이라는 주제는 얽히고 얽힌 인간사의 많은 갈등 중에 꽤 무거운 주제이다.
이도 저도 안될 때는, 미소를 머금고 넌지시 말해주련다.
"지금 당신이 받는 연금 AHV , 내가 내주고 있어."
끝으로, 단조롭고 안정적인 나의 일상에 에피소드 하나 투척해 주신 할매에게 심심한 감사말씀드리며
할머니, 정신차리시고 건강하세요! (진심임, 멕이는거 아님) 난 바빠서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