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안되고 남친은 되는 이유
나는 지금 스위스의 휴양지 중 한 곳인 Saanen에 있는 친구의 별장으로 초대되어 기차를 타고 가고 있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신난 나, 긴 시간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글 쓰는 걸 좋아하기에 노트북 컴퓨터와 충전기를 가방에서 꺼내어 세팅하고 윗도리를 벗어 걸고 기차 타기 전 산 커피 한잔을 홀짝거리며 편안한 상태로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 시간 반쯤 더 가면 나의 친구가 기차역으로 마중 나와 우리는 맛있는 이태리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할 계획이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아주 바람직한 자유부인 주말의 시작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금 기차는 Spiez역을 향해 가고 있다. 나는 이 역을 지나 한참 더 간 Zweisimmen이라는 곳에서 Golden Pass라는 운행 구간의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기차로 갈아타야 한다.
다음 역 안내하는 방송을 배경소리 삼아 컴퓨터로 눈길을 돌려 필요한 리서치를 하고 있을 때이다.
".........................어쩌구 저쩌구 어쩌구 저쩌구.......................Getrennt...어쩌구 저쩌구.............
.......Zweisimmen 어쩌구..............bitte umsteigen."
내릴 때가 한 참 멀었다는 생각에 주의 깊게 안내 방송을 안 들었는데 뭔가 내가 갈아타야 할 역이름과 갈아타라는 동사인 umsteigen이 귀에 확 꽂혔다.
응? 뭐지?
이번에는 귀 기울여 방송을 들으려 허공을 째려보고 있는데, 아놔. 뭔 놈의 공식언어가 4개인 스위스에서는 기차방송 하나도 독일어, 불어, 이태리어, 영어까지 차례차례로 하나씩 나온다. (공식언어 중 하나인 로만슈어는 워낙 하는 사람이 적어 생략하고,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영어방송을 한다.)
불어로 어쩌구 저쩌구 실부쁠레 어쩌구 저쩌구.
아놔 몰라 패쓰.
이태리어로 프록시마 패르마타 어쩌구 저쩌구.
또 패쓰.
마지막으로 나오는 영어방송!
어쩌구 저쩌구...생략 생략..This train will be divided in two. Passengers going to Zweisimmen, please change to the front train.
기차가 둘로 나뉘니 Zweisimmen으로 가는 승객들은 앞의 열차로 갈아타라는 이야기다.
?!!!!!!!!!!!!!!!!!!!!!!!!!!!
뭐. 라. 고?!!!!!!
나는 지금 내 집 안방마냥 살림살이들을 다 펼쳐놓았고, 저거 다 정리해서 짐가방 정리해서 나가면 기차는 이미 떠날 텐데?!!!! 오마이!!!
아니나 다를까 영어방송이 나오고 머지않아 기차문은 닫히고 웅~하는 소리와 함께 기차가 출발한다.
안돼애애애애애애애애애!!!!!
마음속으로 외쳤지만 이미 내가 탄 기차는 다음역을 향해 출발한다.
아.....놔......
밀려오는 짜증을 잠시 뒤로하고 기차시간표를 검색해 봤다.
다음역에 가서 다시 Spiez로 돌아와 다음 Zweisimmen행 열차를 타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도착시간이 한 시간 늦어졌다. 하아, 할 수 없지 뭐. 이미 그렇게 된 일.
기다리고 있을 친구에게 연락을 한 후 다시 Spiez 역으로 돌아와 다음 열차를 기다리려 앉았다.
그러고 보니 기차 놓쳐서 허탈해 보기도 참 오랜만이네. 유럽 와서 처음에는 대학원 입시 볼 때 독일 전역을 기차 타고 삽질(언어 죄송) 참 많이도 하고 다녔었는데. 그러고 나서 또 일자리 잡으려고 오케스트라 오디션 볼 때도 기차 타고 많이 다녔다.
그때쯤엔 내공이 생겨 잘못 타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 경력직, 경력직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뭐 이런 생각을 하며 앉아있는데, 갑자기 열이 확 받는다.
아니 이것들이. 그런 갈아타야 한다는 얘기는 준비할 수 있게끔 진작 진작 해야 할 것 아냐!
표에 그런 언급도 안 해놓고 갑자기 그러면 어떻게 갈아타라는 거야. 확 고소한다 고소미!
하며 기차표가 있는 앱을 열어보는데,
어, 써있네?
깨갱...
표 제일 밑에 코딱지 만한 글씨로 읽기도 어려워서 핸드폰을 자꾸 멀리, 더 멀리하며 읽어보니(노안 절대 아님, 그냥 눈이 피곤해서임, 진짜 아님) 복합 열차의 행선지가 각각 다르니 열차 내 안내방송을 참고하라는 뭐 그런 얘기.
이것들이.
설명이 불충분하잖아!!
Spiez역에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역내 검표원이 돌아다니며
멍 때리고 계신 승객들은 들으시오! 열차 분리됩니다,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이 정도는 외쳐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사람들이 배려가 없어. 아놔.
이상은 G가 기차표 잘 안 살펴놓고 여정이 1시간 늘어나서 화나신 어떤 아주미의 한풀이였습니다.
다음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 되니 사람들이 승강장으로 모여든다.
그런데 이 Spiez라는 곳, 인터라켄으로 가는 길목이라 그런가? 한국 사람이 많다.
내 앞에도 한국인 남녀 커플이 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남자분은 손에 들고 있는 기차표와 전광판을 번갈아가며 째려보고 있고, 그 옆의 여자분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캐리어를 잡고 삐딱하게 서서 남자를 못마땅한 듯 쳐다보고 있다. 딱 봐도 뭔가 기차를 타고 다니다 무언가 문제에 봉착해 싸우고서는 탁한 분위기 속에서도 목적지를 찾아가긴 해야겠으니 2m 거리를 유지한 채 승강장에 서서 기다리는 커플이다.
저들은 연인 사이일까? 신혼부부일까?
무슨 사이가 되었든 어서 와, 유럽 개고생은 처음이지? ㅎㅎㅎ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지금이라도 신혼여행을 스위스로 계획하는 이들에게 이 아주미는 말해주고 싶다.
신혼 여행지로 스위스는 아니 되오!라고.
스위스 관광청에서 나를 잡아가려 할지도 모르니 얼른 덧붙이자면(스위스 국민 되기도 전에 역적으로 잡혀갈 수는 없잖소!) 반대로 연인 사이라면 스위스 여행 강추이다.
그 이유로는:
1. 날씨: 산악 기후인 스위스는 날씨가 변덕스럽고 비가 자주 오거니와 호수가 많아 안개도 잘 낀다. 문제는 산에서의 액티비티와 경치구경이 전부인 스위스에서 비가 와버리면 아무것도 할 게 없다. 비싼 돈 들여와서 그 유명하다는 융프라우, 마테호른 못 보고 간 사람 손! (마테호른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보는 것이니 다음 대에서 기대를 해보는 걸로)
어느 해 4월 우리를 방문했던 영국에 사는 시동생과 그의 아내는 안개가 자욱한 루체른 호숫가에서,
스위스에 산이 있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라는 말을 남기며 일주일 동안 산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실내에서 하는 세련되고 로맨틱한 액티비티가 발달하지 않은 스위스에 신혼여행 차 왔다가 날씨가 협조해주지 않으면 정말 난감하다.
연인과 왔다면, 상대방이 우중충하고 무료한 상황에서 얼마나 창의적으로 즐거움을 찾아내는지, 긍정적으로 임하는지 테스트할 좋은 기회!
참고로 스위스 여행하기에 좋은 시기는 6~8월, 스키를 타려면 12~3월이다. 내 경험으로는 4월과 초겨울이 날씨가 제일 안 좋았다.
2. 음식: 스위스가 옛날부터 잘 살았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위스 대표음식 퐁듀와 라클렛은 가난하고 추운 농가에서 임자, 집에 먹을 게 없소. 빵도 다 말라비틀어지고. 하면서 집에 있는 치즈와 빵으로 끼니를 이어갔던 것으로,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선남선녀들이 특별한 날 샤넬백들고 가서 먹는 음식이지만, 사실은 서민적인 음식이다.
이외에도 스위스 음식은 감자, 치즈, 면을 기본으로 한 음식으로 매 끼 연달아 먹으면 얘가 걔 같고, 걔가 또 얘 같은(가가 가가: 경상도인들만 알아듣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와인 없이 먹을 수 없는 한마디로 컵라면 생각나는 맛이다.
그렇다 보니 음식이 여행에, 삶에 큰 부분인 한국인들에게 스위스는 그리 매력적인 나라가 아니다. 물론, 맛있는 스테이크, 이태리, 스페인 음식점은 찾아보면 있다. 자연스럽게 3번으로 넘어가자면 비싸서 그렇지.
연인과의 여행에서는 이 사람이 음식에 까탈스러운지, 아무거나 잘 먹는지, 춥고 배고플 때 분노 게이지가 얼마나 상승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
3. 비싼 물가: 스위스는 비싸다. 그냥 하나부터 열까지 다 비싸다. 계속.
빅맥 인덱스 다들 알쥬? 2024년 기준 스위스가 8.07 달러로 1위다. 이것은 물론 세트 메뉴가 아닌 빅맥 햄버거 하나의 가격으로 세트 메뉴는 14.20 스위스 프랑, 현재 환율로 22713원이다. 2인 기준 맥도널드 가서 배불리 먹으면 4-5만 원 계산하고 나오는 거다.
둘이서 좀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 와인 곁들여 디저트에 에스프레소까지 시키면 200프랑(약 32만 원)을 훌쩍 넘으니 스위스에 신혼여행 올 사람은 돈 많이 가져오세효.
결혼 전의 연인과의 스위스 여행에서는 그 사람의 경제관념을 알아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써야 할 때 쓰고 아껴야 할 때 아끼는지, 그것이 나의 라이프 스타일과 맞는지 지금 이 사람이랑 계속 가야 하는지 도망가야 할 때인지 생각해 볼 하늘이 주신 기회.
4. 고객님의 편의를 그닥 신경 쓰지 않는 유럽 (Feat. 네가 알아서 해)
그래서, 신혼여행으로 스위스 비추하면 어딜 가라는건데?라고 물으신다면 서비스가 좋은, 손 하나 까닥 안 해도 되는 동남아시아의 5 스타 리조트, 풀빌라를 추천하겠다. 좋은데 많잖아 (물론 나는 안 가봤지만, 패쓰).
결혼 준비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12시간가량 비행기 타고 스위스 오면 day 1부터 내가 다 알아서 부딪혀 나가야 한다. 기차 타고 나처럼 삽질해 가면서.. 유럽은 자급자족의 나라. 인건비가 비싸서 사람 써가며 편하게 다니려면 그만큼의 지출을 각오해야 한다.
날씨도 안 좋은데 기차는 막 두 동강이 나서 난데없이 기차역에서 대기해야 돼, 배는 고파, 근데 뭘 좀 먹으려면 최소 10만 원이야. 이런 극기훈련을 하느니 몸 편하고 고객님들의 편의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을 아끼지 않는 동남아로 갔으면 하는 아주미의 바람이 있네?
연인이랑은? 남친이 이런 극한 상황에서 위기 대처/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지, 갑자기 모든 걸 내 탓하는 성격 파탄자로 변하지는 않는지 작지만 예리한 눈으로 관찰할 수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스위스로 신혼여행을 가야겠다 하시는 분들은 6월~8월 사이에 최소 열흘정도 잡아 와서 하루에 100만 원가량 하는 고객님에게 충성을 바칠 만한 가격을 제시하는 호텔에 묵으며, 하루에 식비로 2인 기준 50만 원 정도 계산해서 오면 된다. 이만큼 혹은 그 이상의 돈을 지불할 의향만 있으면 좋은 곳이 엄청 많은 데가 또 스위스다. 어서 와, 돈 있으면 우리한테 맡겨.
또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를 와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사진 몇 개를 소소하게 투척하며 난 바빠서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