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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Dec 25. 2024

유럽 렌터카 여행 20 - 25만 원짜리 위스키

7일 차 11월 4일 ③

 그린델발트는 산악리조트마을로 거대한 아이거 북벽 기슭에 자리한다. 베른에서 그린델발트로 가려면 인터라켄을 거쳐야 하는데 인터라켄은 융프라우 여행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곳으로 튠호수와 브리엔츠호수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유럽 곳곳의 나라와 도시에서 기차로 이곳에 도착하면 여기서부터 융프라우의 산과 호수, 마을로 떠나는 여행이 시작된다. 교통이 편리하고 수많은 상점과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밤늦게까지 여는 곳으로 차가 없이 기차로 여행을 한다면 그린델발트보다는 인터라켄에 숙소를 잡는 것이 좋다. 우리도 그린델발트로 들어가기 전 인터라켄에 들려 장을 보기로 했는데 그보다 먼저 양조장에 들렀다.


루겐브로이 Rugenbräu https://maps.app.goo.gl/tW8aLtUWXjzTw33j6


  이쯤에서 독자들이 "와이너리 투어에 이어 인터라켄에 와서도 양조장부터 가다니. 에리카의 남편은 술꾼이구만." 하실 수도 있겠다. ㅎㅎ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남편은 술을 즐기는 사람이다. 맛있는 저녁식사 앞에서 어울리는 술을 종종 찾으며 한때는 막걸리를 집에서 직접 빚어서 마시기도 했다. 물론, 나의 주도하에. 쌀만으로도 빚어보고 찹쌀을 섞어서도 빚어보고. 나는 술을 못하지만 누룩을 넣고 고두밥과 섞어 발효시키는 과정이 흥미진진해서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다들 시판 막걸리는 절대로 집에서 만든 막걸리 맛을 따라오지 못한다기에 더욱 흥미가 돋았다. 결과는 대성공. 뽀글뽀글 소리를 내며 발효된 원주를 삼베주머니에 넣고 꼭 짜서 냉장고에 일주일 정도 더 냉장숙성하면 맑은 술이 위에 뜨는데 취향에 따라 이것만 따라서 따로 마시기도 하고 아니면 다 섞어서 물이나 탄산수를 타서 막걸리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나도 조금 마셔보았는데 청포도향이 나면서 상큼 달콤했다. 시판 막걸리처럼 아스파탐이나 단맛을 내는 성분을 하나도 넣지 않았음에도 달콤하고 청량한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의 남편은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거다. 그리고 집 밖에서는 거의 마시지 않고 집에서만 마신다. 내가 해준 맛있는 음식과 같이 마시는 술이 진짜라나. 가끔은 내가 같이 쿵짝을 맞춰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싶다. 


  독일은 맥주가 워낙 유명한데 여기 스위스의 맥주 양조장은 어떨까 궁금해서 루겐브로이를 찾아갔다. 이곳은 직접 생산+발효+보관+유통까지 모든 것을 하는 곳으로 양조장 투어도 따로 운영하고 있었다. 1층 샵으로 들어가니 와인부터 맥주, 위스키, 진까지 다양한 주류가 전시되어 있었고 술과 곁들여 먹는 스낵들도 함께 팔고 있었다. 그리고 한 켠에 바가 있어서 원하는 위스키를 시음해 볼 수도 있었다. (한잔당 일반 위스키 5프랑, 프리미엄 위스키 10프랑) 나는 남편이 요즘 조금씩 위스키를 마시고 있으니 한번 시음해 보라 권하였고 아주아주 친절한 직원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위스키를 따라주기 시작했다. 일반위스키는 한 병에 50~60프랑 정도, 프리미엄 위스키 중 직원이 가장 뛰어나다고 추천한 위스키는 157프랑(25만 원)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향과 맛에 남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가끔 회식에 팀장님이 들고 오시던 유명한 위스키인 조니워커, 발렌타인, 잭 다니엘 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이다. 여행 중이라 낭만이 깃들어서일까. 종류별로 3잔 정도를 마셔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직원에게 건네고 우리는 선물용 와인과 남편이 3박 4일 동안 마실 맥주를 고르기 위해 매장을 돌아보겠다고 했다. 옆에서 쫑알대는 병아리 같은 딸들을 보더니 직원이 "무알콜 맥주 마셔보겠니?" 하고 아이들에게 물었고 아이들은 "우왓! 우리도 마실 수 있는 거예요?" 라며 신나 했다. 직원의 친절에 감사하며 아이들은 바에서 무알콜 맥주를 마시고 나와 남편은 매장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드라이한 레드와인을 좋아하시는 시어머니에게 선물할 것, 드라이한 와인보다는 달콤하고 청량한 와인을 좋아하시는 아빠께 선물할 것, 남편이 먹을 맥주..... 골라야 하는데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아까 위스키를 마시고 남편이 짓던 황홀한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자기야, 아까 그거 그 비싼 위스키 사자!


  평소 근검절약이 생활신조인 나를 알기에 남편은 눈이 커졌다. "아냐, 괜찮아. 선물할거나 고르자." 맥주를 구경하며 남편이 말했다. 157프랑이 비싼가. 그렇지, 비싸긴 하지. 지금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는 스위스에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리 지출이 크지 않았다. 나의 철저한 사전준비와 조사 덕분에. 하지만 친절했던 직원 때문인지, 남편의 표정 때문인지. 나는 그 위스키를 꼭 사고 싶었다. 독자들 중에 소비가 일상화된 요즈음에 25만 원짜리 가지고 유난이다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과 추억을 위해 여행을 하면서는 천만 원이 넘는 돈도 쓸 수 있지만 허세를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는다. 남편과 내가 노력하여 번 돈을 가치 없는 곳에 사용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명품 잡화나 고가의 핸드폰과 같은 소비는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위스키는 꼭 사고 싶었다. 

  술을 즐기지만 한 번에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닌 남편이 오랫동안 이 여행을 추억하며 위스키를 마시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결국 우리는 그 위스키를 사서 그 양조장을 나왔다. 독일어와 영어를 모두 유창하게 구사하던 친절한 직원은 우리가 그 위스키를 사겠다고 하니 웃으며 아까 시음했던 위스키 3잔 값과 아이들이 마신 무알콜맥주 값을 받지 않고 더불어 맥주 6캔 묶음 하나를 선물했다. "원래 맥주를 사려고 왔었잖아."라는 말과 함께. ㅎㅎ 여기까지가 어쩌다 올해 생산된 980병의 스위스 마운틴 싱글 몰트 위스키 중의 한 병이 우리 집 팬트리에 자리하게 되었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나저나 그린델발트 숙소는 언제 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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