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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을 벗기가 망설여지는 이유와 드럼의 다채로운 변주

29

by 이현기

29. 모두의 방귀 냄새가 같다면


신의 아들이 아니어서

군대를 갈 나이에 자연스레 입영 통지서를 받았다.

끌려가는 기분과 해치우자는 기분의 미묘한 균형 속에

조심스럽게 위병소 정문을 통과했다.


같은 옷, 같은 음식, 같은 스케줄.

어느 날 소름 돋게 다가온 한 가지 사실.

저마다의 방귀 냄새가

똑같았다는 점이었다.

누가 방귀를 끼든

아직은 오장육부가 쌩쌩한 젊은이들이라

그날의 먹었던 음식이 일률적인 방귀 냄새를 창조했다.

모두의 방귀 냄새는 오차 범위 안에서

거의 비슷했다.


2년 2개월이라는 의무 복무 기간 동안

계급별로 주어진 명령 프롬프트.

이병은 매우 큰 목소리로 복명복창.

일병은 조금 큰 목소리로 빠릿빠릿.

상병은 적당한 목소리로 재잘재잘.

병장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웅얼웅얼.


왜 다들 특정 계급이 되면

그 계급을 둘러싸고 있는

정형화된 울타리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걸까.

위수지역을 벗어난 탈영은 불법이지만

고리타분한 행동 양식을 탈피하는 것은

잡혀갈 일이 아니지 않나.


'그러면 넌, 너는 벗어나 봤어? 그 울타리 말이야.'


돌이켜 보면

나도 울타리에 갇힌 채 살았다.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친구들이 좋다는 대로

아내가 강권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했을 뿐이다.

울타리 안에만 머물렀다.


마침내 제대를 하고

예비역 마크가 박음질된 군복을 입고

그토록 그리던 집에 돌아왔다.

지긋지긋한 군복을 훌렁 벗어젖히고

사복으로 갈아입으려는 순간

나는 멍한 정신으로 몇 초간 망설였다.

오랜 시간 익숙했던 군복을 벗자마자

도대체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그런 막막함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29-1. 드럼이 건네는 말


고등학교에서 5년 근무를 하고 중학교로 전근을 갔다. 오자마자 2학년 부장 업무를 맡게 되었고 마침 전임 2학년 부장교사와 친분이 있었다. 그분께선 깔끔하게 정리된 인수인계 자료를 건네주며 중학교 애들은 엄하게 지도해야 한다는 말도 라면의 별첨수프처럼 덧붙였다. 엄한 행동 양식이 정확히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막연히 무서운 선생님이 되라는 거구나, 라며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학기 초 각 2학년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하이틴 드라마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악역 선생님 같은 연기를 했다. 험상궂은 외모라는 기본 옵션에 칼과 독을 묻힌 입술로써 까다롭고 엄한 선생님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애들 입장에서는 올해 국어 시간 똥 밟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후였다. 기껏 표독스러운 연기를 했으나 품성 자체가 악독함과 거리가 멀어 무심결에 나만의 부드럽고 유머스러운 언행이 의도치 않게 불쑥불쑥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날 마주치면 도망가기는커녕 너무 해맑게 인사를 해 왔다. 국어 시간이 재밌다며 내가 들어오는 시간만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아이도 존재했다. 희대의 폭군이 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얼마 못 가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어설픈 발연기를 포기하고 그냥 나답게 살기로, 내 방식대로 교육하기로 의지를 굳혔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며 교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뿐했다.


십여 년 전 고등학교에서 근무를 하던 때, 같이 고생하던 고3 담임교사 중엔 대학 시절부터 밴드 음악을 쭉 해오시던 영어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업무 전문성 향상이나 자기 계발을 위해 알차게 사용하시는 열정맨이라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기도 했다. 고3 담임은 수능이 끝나면 수능성적표가 나오기까지 약간의 여유가 생긴다. 수능이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열정맨은 신중하게 미끼를 던졌다.


"현기샘, 이번에 교사 대상으로 종이접기 연수 프로그램이 있는데 같이 가볼 텐가?"


맙소사, 스키연수도 아닌 종이 접기라니. 기겁의 리액션과 정색의 눈빛으로 싫다는 답변을 대신했다. 열정맨은 나의 미온적인 열정에 실망하는 기색이었으나, 수능 이후 내가 한가롭게 시간을 허비하는 꼴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기세였는지 또 다른 보따리를 내밀었다.


"그럼 음악 한 번 해볼 텐가?"


솔직히 음악은 조금 관심이 당겼다.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가 없었던 시절에 TV나 라디오에서 귀에 감기는 노래가 들릴 때면 용돈을 모아 해당 가수의 카세트 음반을 사 모을 만큼 나는 음악에 관심이 많은, 감수성 충만한 학생이었다. 대학생 때는 운동권 선배들의 협박에 못 이겨 풍물 동아리에 들어가 장구를 배웠다. 아이돌 그룹 헤어스타일을 따라 한다고 너저분하게 기른 머리를 찰랑찰랑 휘날리며 덩덩 쿵따쿵, 휘모리장단을 몰아칠 때면, 나를 지켜보던 수많은 여학우들의 마음도 내 부드러운 머릿결을 따라 흩날렸다. 이렇듯 내 삶엔 음악이라는 영역이 약간의 지분이 있었다.


"음악엔 조금 관심이 있습니다. 남자는 기타죠."

"아니, 기타는 내가 칠 테니 자네는 드럼이나 배워. 교사 밴드를 만들 생각인데 드러머가 없어. 내가 드럼 학원 소개해 줄게."


개인의 자유 의지를 짓밟은 막무가내식 처사에 적극 저항해 보고 싶었으나, 영어 선생님은 아마추어 복싱 자격을 갖춘 복서였다... 결국 힘과 권위의 논리에 굴복하여 영어 선생님께서 소개해준 드럼 학원에서 대략 3년 동안 원장님에게 일대일 교습을 받았다. 드럼 학원이 먼 곳으로 이전을 하기 전까지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충실하게 배웠다. 학원 교습에만 만족할 순 없어 거금을 들여 서재방에 전자 드럼을 들이는 정성도 더했다. 이후 열정 많은 기타리스트 영어 선생님과 함께 정기 합주, 학교 축제 및 버스킹 공연, 그리고 전국가요제 본선 무대 진출 등 숱한 음악적 경험을 거쳤고, 현재는 아내(피아노)와 교회에서 찬양단 반주를 하며 드럼과의 동행을 여전히 이어오고 있다.


혹여나 드럼을 탬버린이나 캐스터네츠 같은 일상적이고 유아틱한 타악기로 오인하는 사람이 있으면 당장 단풍나무 소재의 드럼 스틱을 그러쥐고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 16비트 꿀밤을 놓고 싶다. 드럼은 두 손, 두 발을 모두 써야 하는 나름 고난도의 악기다. 여러분이 처음 드럼을 배운 게 된다면 두 손과 두 발이 따로 놀며 인체가 분리되는 듯한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럼은 하이햇, 스네어, 탐탐, 플로어탐, 크래쉬심벌, 라이드심벌, 베이스드럼 등 꽤나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악기다. 각 부위가 내는 음색도 각기 달라 음악의 분위기나 리듬에 맞게 적당한 곳을 타격해야 음악의 맛이 살고 귀가 즐겁다. 보통은 주된 라임을 담당하는 스네어의 가죽이 먼저 벗겨지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스네어만 친다면 너무 단조로운 구성이 되어 버리고 나아가 곡 자체가 죽어버린다. 곡의 흐름에 맞는 변주 및 필인(Fill in)이 필요한 이유다.


오늘도 예배 전 찬양 연주를 위해 드럼을 마주하며 앉아 있다. 마음속으로 실수하지 말자고 조용히 읊조리고 있는 사이 드럼이 비트를 넣으며 말을 건네온다.


"Yo! 매주 고생이 많아. baby~ 실력은 몇 년째 정체되어 있긴 하지만. 북치기박치기."


"진심 어린 격려 고마워. 매주마다 보급용 드럼으로 구색을 갖춘 음색을 내느라 힘들긴 하지만."


"...... 사과할게."


"나도 미안해......"


"아까 말은 농담이었고, 사실은 너의 드럼 실력을 칭찬하고 싶었어."


"진심이야?"


"그럼. 스네어 치는 것도 버거워하던 네가 이제는 자유자재로 다양한 소리를 연주하는 수준까지 오르니 음악이 한껏 풍성해지는 느낌이었거든."


"데헷."


"내 얘길 들어봐.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기준이란 없어. 균열이 가지 않은 범위 내에서 우린 다양성을 인정해야 돼. 보통 드럼에서 스네어가 기준이 되는 리듬이라 생각하겠지만, 심벌 없이, 탐탐 없이, 베이스 없이 스네어만 친다는 건 그저 단조로운 울림에 지나지 않아. 다양한 소리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완성이란 개념에 닿아간다고 생각해. 스네어는 스네어만의 색깔이 있고, 탐탐은 탐탐만의 색깔이 있는데 탐탐이 스네어의 가락을 섣불리 따라 하려고 한다면 밸런스가 무너지고 곡은 망가질 뿐이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야. 너만이 낼 수 있는 아름다운 음색이 있어. 그런데 남의 인생 리듬과 음색이 멋져 보인다고 무작정 따라간다는 건 그만큼 우리의 삶도 단순해진다는 의미지. 너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 세상엔 다채로움이 더해지는 거야. 너만이 낼 수 있는 음색과 파동이 있어. 삶이 더욱 풍요롭고 아름다워지는 건 여러 사람들이 본인만의 악기로 내는 하모니 때문인지도 몰라. 세상에 너라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더해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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