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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란 것을 쏟아버리는 순간
소리는 공기 중의 파동에 섞여 소멸하지만
의미는 고스란히 내 마음이나 상대방의 가슴에
먼지 낀 판각화처럼 남는다.
평소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라
보통 말을 건네기보다 말을 받는 부류에 속한다.
그래도 기본적인 소통과 교류를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의식과 신경을 기울이면서
사람들의 대화에 섞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한 번 분위기에 잘못 휩쓸리면
불현중에 쓰레기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오랜 시간 부패한
음식물 쓰레기 같은 말은
상대방의 마음 안에선
쉽게 사라지지 않는
고약한 악취로 남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러한 말의 본질을
은연중에 알고 계셨던 듯하다.
어릴 적부터 귀에 박히게 들었던
아버지의 따끔하고 신중한 훈계
'되도록 말을 아끼거라.'
태생적인 눌변가인 나로선
말을 아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처 덜 잘린 머리카락처럼
자꾸 삐져나오려고 하는 말을
의식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순간도 있다.
자기 혀를 직접 자른 <올드 보이>의 오대수처럼
물리적인 혀를 극단적으로 잘라내긴 어려울지라도
혀를 단속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까.
부쩍 아버지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요즘이다.
나는 불순물 같은 말을 잘 쏟아내는 분야에선
달변가였다.
"오빠, 세탁기 끝나면 건조기 좀 돌려줘."
신혼 시절에 비해 집안일을 도와주는 횟수가 확연히 줄었지만, 아내가 차려주는 눈칫밥이라도 얻어먹기 위해선 간간이 집안일을 거들어야 하는 게 요즘 시대 중년 가장의 녹록지 않은 운명이다. 결혼 초창기 때는 나름 아내를 위해 식사 준비도 하고 청소기도 돌렸지만, 나의 조악한 음식 솜씨와 미흡한 청소 상태는 아내 입장에선 기준치 미달인지라 이젠 그마저도 자주 시키지 않는다. 무언가 역량이 부족하면 일이 더 이상 부가되지 않는다는 게 세상의 이치인가 보다. 그렇다면 실수인 척 음식물 쓰레기를 한 번 거실 바닥에 쏟아본다면... 목숨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건조기를 돌리는 일은 그다지 힘든 가사 노동이 아니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각각 1층과 2층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1층에서 막 샤워를 끝낸 세탁물 무더기를 2층 건조기로 옮겨 버튼만 누르면 그뿐이다. 빨래에 진심인 아내는 건조기를 구매하기 전, 접이식 빨래 건조대 몇 대를 거실에 늘여놓고 그곳에 난민처럼 빨래를 널곤 했다. 잘 지워지지도 않는 김칫국물을 잘 묻히고 오는 남편과 한창 커나가는 아들 두 명을 키우는 가정이라 접이식 빨래 건조대만으로는 도저히 의류 회전율을 맞추지 못하여 큰맘 먹고 건조기를 구매한 것이다. 이젠 과거의 영광이 묻어있는 접이식 건조대는 앞베란다 한편에 고이 접힌 채 다시 활짝 펴질 날만을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다.
평소 말을 신중하게 하려고 하지만, 이성의 손아귀에 쥐어진 말이 미끄덩, 하고 빠져나오는 날도 간혹 있다. 여과작용을 거치지 않고 쏟아진 말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상대방의 심장에 박혔다. 미세한 사금파리처럼 가슴속 깊이 박혀 있는 말은 오직 고통을 느끼고 있는 당사자만 알 뿐, 말을 건넨 주체의 눈엔 안 보이기 마련이다. 동서양을 망라하여 입은 닫고 귀는 열라는 선조들의 지혜가 괜히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자나 깨나 불조심도 해야 하지만 말조심 역시 해야 한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빅 피처>>에선 로펌 변호사이자 사진작가 지망생인 남자주인공 벤이 소설가 지망생인 아내 베스와 갈등을 일으키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벤은 고액의 연봉을 받고 비싼 카메라 장비를 사들이며 자신만의 암실을 꾸미는 반면, 아내 베스는 여러 편의 소설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봤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는 좌절의 연속이다. 하루는 부부가 평소처럼 실랑이를 벌이던 중 벤이 베스를 향해 꺼내서는 안 될 말을 뱉어버리며 그녀의 꿈을 조롱하고야 만다.
"위대한 소설가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베스는 뺨이라도 얻어맞은 듯 얼굴을 찌푸렸고 벤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 사과를 했지만, 이미 둘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후 둘의 관계는 파국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린다.
내 가슴에도, 상대방의 가슴에도 가시 돋친 말이 무수히 꽂혀 있을 것이다. 어떤 정교한 핀셋을 써 봐도 좀처럼 빼내기가 쉽지 않을 가시. 핀셋으로 가시 하나를 겨우 뽑아낸다고 한들, 이미 그 가시는 심장에 염증을 퍼뜨린 후라 결국 상대방과의 관계는 단절을 향해 나아가고야 만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지만 말 한마디로 인해 천 냥의 채무가 생기기도 하는 법이다.
오늘도 우리 집 세탁기는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디지털 계기판에 명시된 시간이 지나자 청량한 세탁 종료음이 집안 곳곳에 퍼진다. 나는 종종걸음을 옮겨 세탁기에 도착하여 세탁물을 건조기로 옮겨 담기 시작한다.
막 고된 노동을 끝낸 세탁기가 한숨을 돌리며 내게 말을 건네온다.
"내 얘길 들어봐. 성능 좋은 세탁기로도 잘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있어. 특히 오랜 시간 방치된 얼룩은 이미 섬유에 깊게 뿌리 내려서 아무리 빨아도 잘 지워지지 않지. 얼룩 중에서도 가장 안 빨리는 얼룩은 감정의 얼룩이야. 과탄산소다나 베이킹소다를 써 봤자 감정의 얼룩은 잘 지워지지 않아. 설령 얼룩이 희미해질 순 있어도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법이지. 혹시 너도 일상 중에 상대방에게 감정의 김칫국물을 쏟아낸 적은 없니? 감정이란 깨지기 쉬운 유리와 같은 거야. 상대의 마음에 나 있는 유리창을 향해서 돌을 던지지 마. 쉽게 깨질 테고 한 번 깨진 유리는 멀쩡한 유리로 되돌릴 수 없어. 그저 날카롭게 깨진 흔적과 도톨거리는 파편만이 호젓하게 남아 있을 뿐이지. 말의 이러한 특성을 이제야 알아차리고 겸손한 관계를 쌓아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넌 잘하고 있는 거야. 비판보단 칭찬을, 충고보단 위안을 건네는 따뜻한 사람이 되길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