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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
존경하는 인물을 적어 내오라는 과제에
이순신 장군도, 광개토대왕도, 김구 선생도 아닌
부모님 이름을 적어 냈다.
나에겐 언제나 아빠, 엄마가 훌륭한 위인이었다.
언제나 거센 비바람 속에도 낡은 깃을 펼쳐
어린 새끼들의 우산이 되어 주는 부모님은
내겐 용맹한 장군 같은 존재였다.
머리가 자라고 성격이 예민해짐에 따라
내 마음속에 자리한 부모님의 공간엔
점차 녹이 슬었다.
날 구속하는 것 같은 그분들이
날 옭아매기만 하는 그분들이
이젠 더 이상 내게 영웅이 아니었다.
그래서 틈이 생길 때마다
이슥한 골짜기의 게릴라군처럼
그분들께 저항했다.
스무 살이 되어 부모님 곁을 떠났을 땐
해방감에 목이 메어 기뻐 날뛰었다.
구속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입었으며
간섭이 빠진 자리엔 낭만을 채워 넣었다.
부모님을 배제한 공백엔
새롭게 만난 인물들을
하나하나 채워 넣었다.
군에 입대하여 병아리 견장을 어깨에 찼던 때.
고참이 선심 쓰듯 선물한 공중전화 찬스
내 수첩엔 수많은 친구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몇 장을 뒤적거린 끝에 어렵사리 수신자를 결정하고
공중전화의 빛바랜 은색 다이얼 버튼을 꾹꾹 눌렀다.
따르릉릉릉.
발신 신호가 끊긴 수화기 건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어... 엄마.'
'아들?'
마음의 으슥한 구석에서 먼지가 쌓여 가던
'엄마'라는 말을 입 밖으로 건져 올리는 순간
나는 통곡과 절규를 토했다.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는
가뭄에 내리는 폭우처럼
내 마음을 소금물로 적셨다.
가장 외롭고 고된 때에
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그들 품에 안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거미 등짝에 유충을 낳고
거미의 체내에 파고들어 가
체액을 흡수하며 자라는,
종래에는 거미를 죽이고 마는
기생파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날 더 괴롭게 한다.
내 삶이 초고령화 사회라는 시대적 트렌드에 운 좋게 탑승했다면, 지금의 난 인생의 분기점을 막 지난 듯하다. 절반쯤(?)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 보면 나를 효자라고 부르기엔 다소 무리가 따를 성싶다. 부모님을 웃음 짓게 해 줬던 나날보단 걱정을 끼쳤던 적이 더 많았을 것이라는 해쓱한 느낌이 발맘발맘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님의 입장에선 다르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 냉철하게 돌아본 자식으로서의 삶은 그다지 많은 별점을 매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극악무도한 불효자까지는 아닐지라도 여태껏 소소한 불효를 저지르며 살아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요즘 나와 아내를 대하는 아들 녀석들의 태도는 대서양 해양성 기후처럼 변덕이 심하다. 부모의 속을 자글자글 끓이면서 애간장을 태우는 나날이 있는가 하면 애교의 음표를 이리저리 섞어 행복의 음악을 선사해 주기도 한다. 이 녀석들을 영원히 이 시간에 가둬놓고만 싶은 마음은 나만의 이기적인 욕심일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한 아이들이 점차 나이를 먹어 가면 어떠한 모습으로 변할지 벌써부터 쓸데없는 잡념이 찾아든다. 혹여나 불효자 아빠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는 건 아닐는지.
일찍이 아이들을 키워 본 지인들은 자녀들이 부모 뜻대로만 따라주지 않는다며, 자식들이 커 나가면서 더욱 맘고생할 거라는 푸념 섞인 충고를 늘어놓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공감이 잘 가지는 않았다. 분명 녀석들은 장차 훌륭한 의사가 되어 내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루어 주고, 번쩍번쩍하고 비싼 외제차도 사줄 것이며, 럭셔리한 지중해 크루즈 여행도 보내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 관두자.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줘도 그들의 자식으로서의 소임은 다한 것이다.
한국 영화 <보통 사람들>에선 바나나가 귀했던 시절, 자식에겐 온전한 바나나 알맹이를 건네고 아버지는 바나나 껍질에 붙어있는 하얀 체관부 다발을 뜯어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자식을 애틋하게 여기는 부모의 마음을 압축적이고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항상 좋은 것은 자식이 먼저라는 부모의 마음, 예전엔 몰랐지만 이제 나도 부모가 되어 보니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다.
직장의 점심시간엔 가끔 음료수나 과자, 젤리 같은 특별식이 곁들여 나오는 날이 있다. 동료들은 그것들을 식사 후 디저트 개념으로 먹어치우지만, 나는 그것들을 입안이 아닌 바지 주머니 속으로 감춘다. 간식을 좋아하는 아들 녀석들을 떠올리면 도저히 내 입으로 가져가기 미안했기 때문이리라. 퇴근하는 아빠가 뭐라도 손에 쥐고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아들 녀석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리라. 이런 게 부모의 마음인가 보다.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먹음직스러운 망고 푸딩이 나왔지만 불굴의 인내심으로 식탐을 꾹 누르고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군침을 삼키며 구경하고 있다...
최근에 마트에서 바나나 한 꾸러미를 샀다. 매끈한 껍질을 벗기니 껍질 안에 체관부 다발이 진득하니 붙어 있다. 사소한 호기심으로 체관부 다발을 뜯어먹어 봤다. 바나나의 달콤함 과육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밋밋한 맛만 느껴진다. 자식에겐 갓 지은 더운밥을 건네고 자신은 어제 남은 식은 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던 부모님이 떠올랐다. 본인은 색이 바르고 낡은 옷을 입으면서도 수학여행을 떠날 자식의 기를 살려주고자 새 옷을 사러 시내에 나갔던 그 시절과 그 거리.
어쭙잖게 여름 행세를 하는 봄의 더위를 한풀 누그러뜨리는 봄비가 지면에 가벼운 기척을 하고 있다. 아내가 건넨 장우산을 펼쳐 들고 발걸음 무거이 출근길에 나섰다. 여기저기 우산꽃술이 다채로운 형상으로 피어나고 있다. 큼지막하게 펼친 우산은 어떤 비라도 막아줄 것 같다. 그 옛날, 우산을 안 챙겨간 아들을 위해 빗길을 뚫고 아들의 학교로 찾아오시던 그때 그 모습으로 어디엔가 부모님이 서 계실 것만 같다.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방울을 온몸으로 받으며 우산이 말을 건네 온다.
"용케 우산을 잘 챙겨 왔네. 불효자라고 생각하는 양반."
"비가 오면 우산을 챙기는 건 상식이 있다면 당연한 행동이잖아. 뭐, 나도 아내가 챙겨주긴 했지만."
"상식이라, 하하하. 그렇다면 넌 그동안 부모님께 몰상식한 자녀였군. 부모님이 비를 맞고 계실 때에 우산이 되어 주지 못했으니 말이야."
"부모님이 비를 맞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부모님은 늘 자녀를 떠나보낸 상실감과 비애의 빗방울에 젖어 계신다고. 여태 그걸 몰랐어?"
"그렇게 표현하니 할 말이 없다."
"내 얘길 들어봐. 모진 세상의 거친 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위태로운 둥지를 지켜온 건 부모님이란 존재였어. 비가 내릴 때 우산처럼 날개를 펼쳐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물떼새처럼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이란 본인이 젖어가는 건 괘념치 않고 자식들이 비에 젖지나 않을까 속이 닳도록 애를 태우는 거야. 멈추지 않고 냉정하게 흘러가는 야속한 세월은 부모님으로부터 우산을 펼쳐 들 힘마저 앗아가고 있어. 그 좋았던 부모님의 혈색은 어느새 잿빛으로 변하고 거친 손등 위의 앙상한 혈관 안에선 세월의 고된 풍파가 남긴 탁해진 혈류만이 천천히 흐를 뿐이지. 이젠 부모님이 비에 젖어 외로이 떨지 않도록 네가 부모님의 우산이 되어 줘. 부모님의 보호막과 그늘막이 되어 줘. 너의 그 힘센 손으로 부모님을 향해 우산을 펼쳐 들 때야. 너는 불효자라고 자책하지만 사실 넌 효자였어. 진짜 불효자는 부모님을 떠올리지도 않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