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바람을 가득 담은 가을이 찾아오면
연을 사거나 만들어서 하늘에 띄우곤 했다.
대중적인 가오리연과
나름 고난도의 스킬이 필요한 방패연.
연은 바람결의 진폭과 속도에 따라
혹은 실을 감거나 풂에 따라
잠이 덜 깬 나비처럼 나풀거렸다.
연의 아름다운 비행이 지속가능해지기 위해선
실은 늘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바람이 심술궂은 힘으로 엄포를 놓으면
연틀은 내 손에서 벗어나고자 발악했다.
악력이 약해 연틀을 놓쳐버리는 순간
주인 잃은 연은 하늘의 구석구석을 방황하다
미지의 공간에 쓸쓸히 낙하했다.
'삶의 악력을 키워보는 건 어때?'
회오리바람이 요동치는 삶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무수히 소중한 것들을
놓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때 더 콱 쥐었더라면
그때 그걸 놓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 삶은
바람 좋은 날에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는 연처럼
황홀한 비행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지극히 무책임하고 어리석음이 묻어난 병적인 회한만이
남아있을 뿐.
잔잔하고 고요했던 수면 위에서 저녁 어스름을 담요 삼아 고이 잠자던 침묵이 화들짝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갑작스레 일어난 파문은 저수지의 표면에 각기 다른 지름의 동심원들을 일렬로 새기기 시작했다. 저 너머의 땅까지 닿겠다는 기세로 있는 힘껏 던진 둥글넓적한 돌은 십 단 콤보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돌멩이는 깨금발로 물의 표면을 총총총 위태하게 딛다가 추동력이 떨어진 어느 지점에서 펄펄 끓는 육수 안에 수제비가 가라앉듯 심연 속으로 침잠했다.
어렸을 적 물수제비를 잘 뜨는 친구들을 보면 괜스레 경탄의 감정이 솟아올랐다. 마음의 돌은 저수지 건너편까지 가 있었지만, 정작 현실은 중간 지점도 못 가서 무력하게 내려앉는 돌을 그저 안타깝게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그 시절의 저수지 밑바닥에는 그동안 내가 가라앉힌 헤아릴 수 없는 돌들이 얼마나 높은 돌무더기를 이루고 있을까.
물가에서든 육지에서든 돌 하나만 있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덤벙한 물이 있는 곳에선 물수제비를 뜨고 평평한 육지 위에선 비석 치기를 했다. 물수제비나 비석 치기나 납작하고 평평한 돌을 잘 골라온 사람이 놀이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물수제비는 아련하고도 상실적인 성취감이 있었지만, 난이도를 조금씩 높여가면서 상대편 돌을 쓰러뜨리는 비석 치기는 옹골지고 야릇한 쾌감을 던져 주었다.
상대편 돌을 여러 번 쓰러뜨린 비석 치기 돌을 신줏단지 모시듯 집에 가져갔다가 어머니의 잔소리 장풍에 맞아 쓰러진 경험이 있어 당일의 비석 치기 돌은 미련 없이 현장에 내팽개쳐 두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가족애라는 연기가 모락 피어오르는 식탁에서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는 감자수제빗국을 맛있게 들이켰고 내가 버리고 온 비석 치기 돌은 전장에 외로이 남아 내일의 전투를 꿈꿨다.
돌은 어디에 놓여 있더라도 그곳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슬아슬한 균형 감각으로 겹겹이 쌓인 돌탑의 돌들은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었을 터이고, 동네 공터에 버려진 비석 치기 돌은 누군가의 집념과 의지의 집약체였을 것이다. 중력을 거스르고 낮게 비행하다가 종내 저수지의 바닥에 가라앉고야 마는 물수제비 돌은 누군가의 부유하고픈 꿈이었다. 이처럼 우리 삶 곳곳에 널브러진 돌들은 다 나름의 의미가 있기 마련이다. 파도와 해류의 정(丁)으로 수천 년 동안 깎이고 깎인 바닷가의 몽돌들이 오랜 시간 누적된 고대의 역사를 몸소 증명하듯이.
퇴근길 무렵, 아스팔트 길 위에 뻘쭘하게 눌러앉은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다. 장난기가 발동해 엄지발가락에 힘을 잔뜩 주며 돌을 저 멀리 걷어찼다. 아스팔트 지면 위에서 물수제비처럼 튕기던 돌은 자칫 동료 교사의 자동차 범퍼에 닿을 뻔하다가 이내 방향을 꺾어 몇 번 텀블링을 하더니 길가 어느 지점에 멈춰 섰다. 무심코 걷어찬 돌에 애먼 수리비를 물 뻔했다.
얼마나 걷어 차였는지 생활 흠집이 온몸에 가득한 돌멩이가 나에게 말을 건네 온다.
"야, 이 난폭한 인간아. 네가 날 걷어찰 자격이나 돼?"
"어? 돌이 말을 하네? 신기하다..."
"여태껏 다른 사물들하고는 잘만 이야기해 왔으면서 정작 불리한 상황에 놓이니까 안 들린 척하는 거야?"
"들켰군... 계속 말해 봐."
"넌 언제까지 나처럼 살 거야?"
"너처럼 이라니?"
"내 얘길 들어봐. 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며 지금 이곳까지 흘러 왔어. 거칠고 딱딱한 아스팔트 위가 낯선 것도 서러운데 종종 사람들이 나만 보면 걷어차는 행태를 부리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둥글둥글한 공이나 걷어찰 것이지 왜 하필 날 걷어차는 걸까? 내 본질은 걷어차이는 것과는 거리가 먼데도 말이야. 지금 날 걷어찬 건 너지만, 너 역시 세상에 걷어차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네 스스로의 힘으로 지금의 네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게 아니라, 사회가 정해준 대로, 남이 정해준 대로 여기저기 걷어차이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냐고.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이 최선의 존재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넌 여전히 계속 걷어차이고 흔들리고 있잖아. 애매한 곳에 정착하면 나처럼 계속 걷어차일 뿐이야. 잘 생각해 봐. 더 이상 걷어 차일 일 없이 네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부디 너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곳에 안전하게 정착하길. 그리고 앞으로는 함부로 돌을 차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