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여름의 장마철 저녁.
시골 지방도를 무심하게 달리다
도로 위에 쏟아져 나온 맹꽁이 떼를
무기력한 바퀴로 대량학살했다.
자동차 바퀴에 깔린 가엾은 맹꽁이 떼는
짝을 찾거나 산란을 위해
부득이한 심정으로 도로를 가로질러야 했을 텐데.
사랑과 생명을 미처 꽃 피우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로드킬을 당한 것이다.
그들의 세계엔 교통 법규라는 것이 없고
아스팔트 도로도 그들의 세계관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자의적으로 만든 규칙을 위반한 대가는
내장이 터지고 납작한 형태로
우그러질 뿐.
인간 사회라고 해서
로드킬이 없는 건 아니다.
과속과 신호 위반, 부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다치거나 생명을 잃기도 한다.
나도 어느 날 새벽에
불법 유턴을 하는 차량에 치였다.
다행히 생명은 건졌지만
교통 법규를 무시하여
날 다치게 한 그 타인이
내 일상에 불편을 준 그가
원망스러웠던 건 사실이었다.
'너는 인생의 신호를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
신호 체계를 잘 지켜왔다고 자부하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인생이 보낸 신호를 무시한 적이 많았다.
멈춰라 했을 때 지나쳤고
지나가도 된다는 신호가 왔을 땐 우물쭈물 망설였다.
인생의 신호를 가벼이 여긴 결과
삶은 무너지고 파괴되었다.
도로 위의 맹꽁이 사체와 나는
별반 차이가 없는 건 아닐까.
나는 과연 올바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밤이 깔린 거리는 네온사인마저 잠든 어둠의 공기로 가득 차 있다. 분주히 도로를 오가는 차량만이 아련한 헤드라이트와 둔탁한 배기음 소리로 고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을 초입의 장승처럼 요지부동 자세로 횡단보도 가장자리에 외로이 서 있는 키다리 신호등은 빨강과 초록을 규칙적으로 왕래하며 점멸을 반복했다.
나는 횡단보도 언저리에 서서 빨강이 초록으로 전환되는 타이밍을 어렴풋이 헤아렸다. 어느새 온몸에 알코올 향수를 뿌린 듯한 아저씨 한 분이 내 곁에 바짝 다가서더니 빨강 신호가 적나라하게 켜진 횡단보도 위를 비틀비틀, 당당하게 가로질렀다. 어? 신호 위반인데. 나는 본능적으로 차량이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닌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오가는 차량은 없었지만, 왠지 가만히 서 있는 내가 바보가 된 듯한 기분도 얼핏 들었다. 차도 오지 않는 마당에 나도 그냥 건너갈 걸 그랬나?
신호등은 세상에 규칙과 질서를 부여한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시민 의식이 높은 편이라 사람들이나 차량이나 신호등의 시그널을 잘 지키는 편이지만, 도로가 한산하거나 인적이 끊기면 무질서적인 행태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어둠이 켜진 이슥한 밤, 신호 따위 무시하는 총알택시와 배달 오토바이, 빨간 신호등이 만류하더라도 기어코 횡단보도 위를 무단으로 활보하는 사람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신호등의 불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착한 아이였다. 신호를 꼭 지키라는 프로토콜이 주입된 인조인간처럼 따박따박 신호를 잘 지켜 왔다. 친구들이 스스럼없이 무단횡단을 해도 난 그들 무리에 끼지 않고 우직하게 신호가 바뀌길 기다릴 뿐이었다. 어른이 되어 내 차가 생기고 난 후도 바른 아이 습성은 변하지 않았다. 늦은 시각, 주행 차량의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시골 지방 도로 위에서도 신호등이 멈추라면 착실히 멈춰서 기다렸다. 그게 옳다고 믿었으니까. 어쩌면 과태료 납부 및 생명 단축이란 예리한 사상이 바늘이 되어 내 양심을 날카롭게 찔러댔을지도 모른다.
한 때 경제적 자유라는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고 싶은 조바심 탓에 투자에 과감하게 손을 댔다가 쫄딱 망해본 경험이 있다. 정당한 땀방울에 대한 신호 위반이자 속도위반을 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인생이 떼민 어마무시한 과태료 고지서를 건네받았다. 노력한 만큼의 성실한 대가를 지급한다는 공정한 시그널을 무시한 나의 오만이자 어리석은 착각은 나로 하여금 꽤 비싼 인생 수업료를 지불케 했다.
아무도 없는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등이 내뿜는 빨간 눈빛을 조용히 응시했다. 빨강 바탕 안에 가만히 서 있는 실루엣이 왠지 날 움츠리게 하는 것 같다. 이내 초록빛으로 신호가 바뀌어 실루엣은 역동적인 포즈로 바뀌었다. 실루엣이 왠지 나에게로 다가오며 말을 건네는 듯하다.
"어이, 미련한 개미 투자자 양반."
"꼭 그렇게 아픈 상처를 다시 도려내야만 속이 후련하십니까?"
"분명 그때 정지 신호를 알아차리고 도중에 멈췄더라면 상처와 피해는 그리 깊지 않았을 수도 있었어."
"돌이킬 수도 없는 이야기는 속상하기만 하니까 이제 그만 얘기하시죠."
"지금 네 인생이 빨간불이라고 생각해? 위태위태한 데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상태처럼 말이야."
"굳이 신호등에 비유한다면야 빨간불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아니면 신호 체계를 무시해서 큰 사고를 당했다거나."
"내 얘길 들어봐. 언제까지 멈춰 있는 인생이란 없어. 실은 멈춰있다는 표현보다는 움직일 때를 기다린다는 말이 적절할지도 모르지. 빨간불인 상황에서도 그저 기다리고 견디다 보면 초록불이 켜지는 순간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반드시 오기 마련이야. 난 가끔 몇몇 사람들이 조급한 마음에 내 신호를 무시한 채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것을 목격했어. 당장은 그게 빨라 보일지 몰라도 그런 행동이 반복된다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초라하고 비극적인 결말이 찾아올지도 몰라. 사람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어. 신호 따위는 무시한 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그저 나아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지. 하지만 비극이란 건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어. 비극을 예방하기 위해선 너만의 속도와 신호를 준수해야 하고. 남들보다 먼저 건너가지 못했다고 너무 자책하지는 마. 인생이란 치열한 레이스(Race)가 아니라 일종의 산책(Walk)과도 같으니까. 상처는 언젠가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기 마련이야. 너만의 속도와 신호를 잘 지켜나가다 보면 반드시 목적지에 다다르는 순간이 올 거야. 빨리 간 사람들이라고 빨리 도착하는 게 아니더라. 그들도 어딘가에 멈출 수밖에 없는 게 세상의 이치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