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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집이 책이 많았다.
아버지의 교육열이 조성한 다독의 환경.
나의 DNA엔 베푸는 걸 좋아하는 유전자가 있었나 보다.
어느 날은 초등학교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집에 있는 책과 장난감을 상품으로 걸고
재미있는 놀이를 진행했다.
내 것이 남의 것이 되는 빼앗김의 현장이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속상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의 퍼주는 습관은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도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퍼주는 건 좋다 치자.
나는 남들에게 무언가를 퍼주면서
내 마음까지 갖다 바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는 이렇게 너에게 모든 걸 내어주는 데
너는 왜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
흔해 빠진 물질을 바라지는 않아.
날 향한 진정한 마음이면 돼.
난 관계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고.
난 뿌리까지 너에게 내어줬는데
넌 나에게 잎사귀 하나 내어주지 않는구나.
'뿌리를 내준 대가는 결국 시듦 뿐이야.'
뿌리 뽑힌 내 삶은
점점 메말라갔다.
그늘을 내어주기만 해도 충분했던 상황을
나는 뿌리까지 뽑아가며 내어준 결과
어떤 토양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다른 나무와 숲을 이루지도 못하고
서서히 뜨거운 태양빛에
외로이 시들어갔다.
장난스러운 운명이 내 팔자를 교묘하게 비비 꼬아놓았는지 초임교사 때부터 지금까지 남학생들하고만 교직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여학교에서 근무를 안 해봐서 서운하다는 푸념은 아니다. 수업 태도와 낭랑함의 측면에서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낫다는 말이야 심심치 않게 들려오지만, 남학생들도 분명 그들만의 청량한(?) 매력이 있기 마련이라 내가 남학교에서만 근무를 해온 과거와 현재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가끔 정신이 몽롱한 날에는 남학생들이 아들처럼 귀엽게 느껴지기도 한다...
여학교에 근무 중인 옛 동료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그쪽 학교의 구체적 실태를 듣다 보면 여학교는 서슬 퍼런 덫이 군데군데 깔린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여학생들 비위 맞추기가 그렇게나 힘들단다. 일반화시키기엔 객관적인 근거가 부족하지만, 내가 겪어본 남학생들과 남의 입을 통해 들어본 여학생들의 생활양식을 비교해 보면 요령부득에 가까운 하나의 결론이 도출된다. 낭설에 가깝지만 논리적이고도 엉뚱한 사유와 사색을 통해 발견한 법칙 하나를 밝히고자 한다. 이른바 '99:1의 법칙'이다.
'남학생은 99번 구박하다가 1번 잘해주면 충성을 맹세하지만, 여학생은 99번 잘해주다가 1번 실수하면 철천지 원수가 된다.'
실수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나로선 여학교에서 근무를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신상에 이로울 지도 모른다.(혹은 여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보라는 칠판은 안 보고 나의 외모에 푹 빠져 정신을 놓아버린다면 그녀들의 학업성취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나쁜 교사로 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편의적 측면에서 99번 잘해주는 것보다 99번 타박하는 게 더 손쉬운 일이기도 하고(?), 어쩌다 한 번씩 쓰담쓰담해 주며 알랑방귀를 뀌어주면 되니 남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는 건 얼마나 속 편한 일인가.
나는 세상 복잡하게 살 것 없다는 남학생들의 단순무식, 아니 어리숙함을 사랑한다. 혹여나 오해를 일으킬까 봐 미리 말해두자면 철저하게 99:1의 법칙에 의거해서 남학생들에게 99번의 타박을 주는 건 아니다. 나는 나름의 확고한 교육적 철학 안에서 혼낼 건 혼내고 칭찬할 일이 있으면 인자한 미소로 그들의 자존감 수치를 높여주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교사다. 그런데 여학생들과 한 번 원수가 되면 일 년 내내 인사도 안 하고 선생님을 쏘아본다고만 하던데 과연 사실일까? 여학교에 근무하시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사건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학교 현장을 과장, 왜곡한 측면도 어느 정도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설마 그러겠어...
올해는 남고에서 남중으로 전보를 와서 리셋된 관계 속에서 새로운 구성원들에 적응 중이다. 이전에 남고에서 근무했을 때는 대체로 인간관계가 좋았으나 일면으로는 괴로운 측면도 있었다. 원체 비난받을 용기가 없는 내향형인지라 신중을 기해 상대방과 따스한 감정을 조금씩 쌓아나가며 관계의 온난전선을 유지하고자 애써 왔다. 적을 만들지 말라는 상투적인 말은 오직 날 위한 맞춤형 경구와도 같았다. 하지만 정말 사소하고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은 그동안 공들여 쌓아 놓은 관계의 돌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 망가진 마음의 돌탑을 다시 세우기까지는 또다시 많은 시간과 정성이 소요된다는 사실은 둘째 치고, 이미 관계가 틀어진 상대방은 주춧돌을 세울 자리마저 쉬이 내주지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돌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만의 비밀스러운 고독의 돌탑을 쌓아나가리라는 결심을 품게 된 것이.
큰 아들 녀석의 토요 바이올린 교실이 열리는 초등학교의 운동장 한편에는 범상치 않은 뉘앙스를 풍기는 미끄럼틀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다. 통상적인 계단이 없고 로프를 타고 올라가야 비로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올 수 있게 설계한 사람의 던적스러운 속마음이 내심 궁금했다. 힘 좀 있고 요령 붙은 아이들만이 미끄럼틀을 탈 수 있겠구나, 하는 신자유주의 사상에 가까운 염려를 하고 있는 사이 미끄럼틀이 미끄러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 온다.
"남학교 맞춤형 교사 양반, 안녕."
"아직 여학교를 겪어보지도 않았는데 남학교 맞춤형 교사라니. 너무 섣부른 판단 아니야?"
"이미 네 마음속은 확증 편향이 자리한 거 같은데? 여학교보단 남학교가 근무하기 수월하다는."
"뭐라 반박을 못하겠네."
"요즘 관계에 대해서 고민이 많구나."
"맞아. 사실이야."
"내 얘길 들어봐. 사람과 깊은 관계를 쌓아나가는 건 급한 경사 위에 놓인 로프를 간신히 붙잡고 조금씩 발을 내디뎌 올라가는 것처럼 비단 쉬운 일은 아니야. 많은 시간이 걸릴 테고 걸맞은 정성과 소통, 교감이 필요할 테지. 하지만 힘겹게 관계의 정점에 올라섰다고 해도 거기서 미끄러지는 건 한 순간이야. 어쩌면 인간관계에 적잖이 실망한 시공업자가 관계의 아이러니를 보여주기 위해 나를 요 따위 형태로 만들지 않았을까? 조금 허망한 부분이긴 해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냉혹한 현실이기도 해. 기를 쓰고 올라간 노력에 비하면 미끄러지는 것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니까. 남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마. 애초부터 남들에게 호의를 건네기만 할 뿐 거기에서 그들이 어떻게 반응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마음가짐이 필요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철부지 막내의 투정이나 다름없다고. 그냥 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풀기만 하면 그뿐, 너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할지는 순전히 상대방의 선택이자 결정이야. 네가 맘 졸인다고 그들의 마음이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거든. 애써 감정의 해류를 거스르려고 하지 마. 남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내어줄지언정 뿌리까진 내어주진 마. 그동안 상처가 컸겠다. 기초석을 놓으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넌 분명 흔들리지 않는 관계의 탑을 만들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