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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Apr 08. 2024

<수남과 선주> 1화

중간고사

 어느새 중간고사가 태평양 어느 지점에서 발생한 태풍처럼 무섭게 다가오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점수 따위에 관심이 없었던 못난이들이 아래를 든든하게 깔아줘서 유리한 고지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지만, 여기 국어교육과는 고등학교 때와는 레벨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여긴 고등학교에서 날고 긴다는 성적 우수자들이 모인 집합소 아니던가. 아무리 지방의 국립대학교라곤 하지만 IMF의 여파로 인해서인지 갑자기 사범 계열의 인기가 확 올랐고, 원래 우리 과의 위상과 지위를 보더라도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에 갈 수 있는 학생들이 모여 사는 야생 인프라였다. 까딱 방심하면 경쟁자들에게 물어 뜯겨 학점이 너덜너덜해지는 것은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분명 입학할 때는 비슷비슷한 내신 성적과 수능 성적을 가지고 공평하게 들어왔지만, 이상하게도 입학 후에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학점 차이는 점점 벌어졌다. 남학생들이 똥멍청이가 되버리는 사태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분분했지만, 결국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거릴 만큼 수긍한 변인은 바로 술이었다. 모든 남학생들이 똥멍청이가 되기 전에 바로 잡을 건 바로 잡아야 했다. 이에 국어교육과 남자들의 모임인 ‘한불휘’의 추장으로 선출된 예비역 선배는 시험 기간을 맞이하여 학과 방명록인 ‘둘기네집’을 통해 근엄한 필체로 무지한 남자 백성들을 향한 강력하고 어마무시한 칙령을 남기셨다.       


 『한불휘 칙령 1999-1호』     


 ‘국어교육과의 든든한 뿌리, 한불휘의 추장 ○○○은 중간고사 기간을 맞이하여 전 한불휘 대원들에게 아래와 같은 칙령을 선포한다.’     


 제1호 – 중간고사 기간 중 모든 한불휘 대원들의 금주(禁酒)를 명(命)한다.     


 제2호 – 제1호와 관련하여 금주령(禁酒令)을 어긴 한불휘 대원들은 현장에서 추포하여 즉각 처형한다. (시험 기간 중 추장의 직속부대인 ‘예비역별동대’를 창설하여 학교 근처의 술집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다.)      

    

 제3호 –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음주(飮酒)를 해야 하는 한불휘 대원들은 음주(飮酒)에 대한 합리적인 사유와 정의로운 명분을 200자 원고지 20매 내외로 작성하여 간절한 마음을 담아 추장님께 소(訴)를 올려야 한다.    

 4호  - 3호와 관련하여 소()를 읽은 추장님이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닭똥 같은 눈물 방울을 소()에 뚝뚝 떨어뜨려야 음주를 허()한다. 추장을 울리지 못한 소()는 폐기 처분한다.     


 위 칙령은 1999.00.00, 00시부터 효력을 발휘한다.


 

 추장님의 추상같은 칙령이었지만 칙령을 자세히 파헤쳐보면 뭔가 어처구니가 가출해버린 포인트가 몇몇 보였다. 일단 예비역별동대의 창립 및 성격 문제다. 말로는 술집 순찰 강화라곤 하지만 결국 예비역 선배들은 시험 공부를 포기하고 합법적으로 술을 마시겠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음주를 허락해달라는 소()의 존재. 200자 원고지 20매 내외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사유와 명분이 있어야 할까. 예를 들어 여자한테 이별을 통보받은 한 남학생이 이별을 극복하고자 술을 마셔야 하는 사유라면 이걸 4000자 내외의 분량에 어떻게 담아내야 할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거의 단편 소설 하나를 창작해야 하는 고통이 수반될 게 분명해 보였다.      


 결론적으로 한불휘 칙령에 담긴 주제 의식은 간단명료했다. 군필자는 음주 가능, 미필자는 음주 불가능.  가뜩이나 못 먹는 술, 그냥 안 마시고 공부나 해서 학점 관리나 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범대 도서실에 자리를 잡아 두꺼운 전공 책을 펼친 후 내용의 완벽한 이해가 아닌 암기를 해 대기 시작했다. 평상시 수업 시간 때도 느꼈지만 대학에서 배우는 내용들은 고등학교 때 배웠던 지식이랑 결과 질이 완전 달랐다. 이해가 잘 안되면 외우기라도 하자. 난 포기가 빠른 편이었고,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을 때 암기만큼 가성비가 좋은 학습 방법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기에 이해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계속 외우고 또 외웠다.  

    

 외우는 학습 방법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면 머리가 금방 뜨거워진다는 것이다. 내 머리가 가습기의 스팀이 되기 전에 이만하면 됐어, 라고 병든 병아리처럼 스스로를 위로한 후 하숙집으로 늦은 귀가를 했다. 내가 기거하는 하숙집은 학교 후문 번화가 뒤쪽 동네 구석에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층짜리 정겨운 단독주택. 1층은 주인 아주머니댁이 기거하는 본관이었고, 2층은 하숙생들이 기거하는 별관으로 사용되었다. 2층에는 방이 3개 정도 있었고 각 방에는 2, 3명의 하숙생들이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내 룸메이트는 전기공학과를 다니는 썩 잘생긴 녀석이었다. 룸메이트는 얼굴값을 하는 건지 이성과 외박하는 날이 잦았다. 덕분에 난 2인실을 1인실처럼 사용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가끔 룸메이트가 외박을 안 하는 날이면 녀석은 자신의 연애 능력을 과시하듯 만나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브리핑을 해댔다. 녀석은 양다리였던 것이다. 나도 신체학적으론 양다리를 가지곤 있었지만, 여성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녀석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과연 그것은 사랑일까. 사랑이란 감정을 가지고 두 여성을 만나고 있는 걸까? 오래 고민할 사안도 아니다. 그저 엔조이다.      


 하숙집을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학교 후문은 휘황찬란한 조명 빛 가게들이 즐비해 있었고 가게 안에서는 정겨운 꾀꼬리 한 쌍이 아닌 사람 암수가 술에 취한 채 다정히 노닐고 있었다. 시험 기간에 술을 퍼마시고 있다니. 술집 안의 다정한 암수들이 참 한심해 보였다. 아무튼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관찰하며 나 자신에게 떳떳함을 부여하고 있던 찰나, 내 시선은 술집의 한 여인에서 고장난 기계처럼 멈춰버렸다. 잘못 본 것일까. 내 눈의 포커스를 조절하고 다시 뚜렷한 시선으로 술집의 한 여인을 응시했다.

 

 선주였다. 아니, 저 자리에 앉아서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선주라면 이건 현실적인 개연성이 너무 떨어지지 않나? 그녀는 독실한 신앙인이었고 숱한 술자리에서도 콜라나 사이다를 먹고 취한 척을 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녀가 창조한, 말도 안 되는 가상의 세계에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순수한 그녀와 순수하지 않은 술이라는 도구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술집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그녀를 부축해주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하지만 나하고 안면이 없는 손님들이 그녀의 술친구라는 타이틀로 그녀 주변을 감싸고 있었고, 난 그녀의 경호원도, 호위무사도 아니었다. 애인은 더더욱 아니었고 단지 그녀의 국어교육과 남자 ‘동기’일 뿐이었다. 당장 그녀를 부축해서 술집에서 데리고 나오고 싶었다. 망가져 가고 있는 그녀를 그저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사실은 내 마음속에 패배감이란 군청색 꽃을 싹틔웠다. 그녀에 대한 무거운 기억을 안고 다시 하숙집을 향해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날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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