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남과 선주> 2화
그녀의 미소를 회복시키는 마술
과목별 중간고사 결과가 순차적으로 나왔다. 나의 단순암기식 학습법은 결코 높은 학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벼락치기 효과는 있었는지 중간 이상의 성적은 받았기 때문에 ‘우수함’이라는 타이틀은 어불성설이고, ‘어영부영함’이라는 타이틀은 간신히 얻었다. 그녀는 믿기 어렵게도 동기 성적 1등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세상은 불공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시험 기간에 술에 만취했던 그녀의 1등과 벼락을 마구 때려가며 공부했던 나 변수남의 9등……. 하지만 1등이 그녀라면 충분히 납득하고 싶었다. 성적 1등이든, 좋은 사람 1등이든 그녀는 1등이라는 타이틀이 꽤 어울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은 여전히 술에 취한 채 예쁜 눈매가 그날따라 축 쳐저있었던 그녀의 아프고 비밀스러운 사연에 대한 궁금증으로 온통 가득차 있었다. 국어교육과 학도답게 ‘5W 1H 원칙’을 적용해서 해결의 열쇠를 찾아보기로 했다.
Who : 정선주란 이름의 그녀가
When : 시험 기간이 한창일 때
Where : 학교 후문 근방 술집에서
What : 술을
How : 엄청 많이 마셨다.
Why : 왜…….
잘 나가던 브레인스토밍이 ‘Why’에서 빨간불이 짙게 들어온 신호등처럼 멈춰 섰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왜 마셨을까……. 도무지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혼자 끙끙 앓는다고 나오는 결말도 아니었다. 결국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선 그녀에게 직접 답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시험 기간도 끝났지만 최근 들어 가끔 마주치는 그녀의 표정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근심이 그녀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그녀에게 차마 말도 못 꺼낼 만큼의 보랏빛 아우라가 그녀 주변을 감싸고 도는 것만 같았다. 생기발랄했던 그녀만의 따스했던 에너지가 그리웠다. 예전의 그 등나무꽃 미소가 다시 그녀에게 찾아와 주었으면……. 그녀와 마주 앉아 무슨 이야기든 하고 싶다. 될 수만 있다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듣고 싶다. 아니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무슨 명분으로 그녀를 불러야 할까. 명분이야 딱 하나 있긴 했다.
“아무래도 돈가스를 싫어하는 것 같단 말이지. 흐음.”
“아니야, 정 확인하고 싶으면 다음에 여기 한 번 더 오든가. 오늘은 도저히 날이 아니거든.”
예전에 돈가스집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말들이 포토그래픽 메모리처럼 떠올랐다. 그래. 명분을 찾았다.
“내가 여기 너랑 또 온대? 김칫국부터 마시기는…….”
“그냥 그렇단 말이야. 나 진짜 돈가스 좋아하는데…….”
“너, 귀여운 구석이 있다?”
나를 귀엽다고 생각했다면 그녀는 귀여운 나랑 돈가스를 먹는 게 나가기 싫은 소개팅 자리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떨리는 손가락을 애써 진정시키며 문자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랑 돈가스 좀 먹어주라’
거창하게 사랑 고백하는 것도 아닌데 멘트가 영 맘에 안 들고 구걸하는 듯 거슬렸다. 썼던 문자를 다시 지우고 문장을 이리저리 고치기 시작했다. 일단 핵심어는 ‘돈가스’로 확정이 된 상태인데 문장을 어떻게 꾸며야 돈가스 회담을 수락해줄까? 정중하면서도 박력 넘치는 과감한 어조로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싶은데. 고등학교 시절 습작 소설 쓰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았다.
‘돈가ㅅ’
맙소사! 돈가스란 말도 완성 못 했는데 내 빌어먹을 엄지손가락이 얄밉게도 메롱, 하며 전송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돈가스란 단어에서 브레인스토밍이 멈추자 내 엄지손가락은 그새를 못 참고 나의 필력을 조롱하며 박력 넘치는 과감함으로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내고 만 것이다. 이를 어쩐다. 다시 문자메시지를 보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지이이잉’하는 진동 소리가 진동하며 그녀에게 답장이 왔다.
‘돈가ㅅ 콜! 예전에 먹었던 그곳, 오늘 12시 40분!’
그녀는 다행히 ‘돈가ㅅ’의 의미를 알아차렸고 나의 찌질한 박력에 순순히 응해 주었다. 돈가스를 사주는 것만 가지고는 그녀의 환한 미소를 되찾아주기에 뭔가 많이 부족해보였다. 하,지,만 나에겐 언젠가 여자한테 고백할 때 써먹으려고 배워놓은 비기의 카드 마술이 있었다. 가방에 늘 넣고 다니는 트럼프 덱을 꺼내서 J(잭)♥, Q(퀸)♥, K(킹)♥ 세 장을 따로 간추려 가위로 자르고 지우개로 그림을 지우고 하며 그녀의 웃음을 되찾아주기 위한 트릭을 만들었다. 비법 영상을 유료로 결제하고 배운 마술이기 때문에 분명 극적으로 통할 것이다. 하지만 눈치 빠른 그녀 앞에서 걸리진 않을까. 잘 통해야 할 텐데……. 이 카드 마술이 신기한 마법을 부려서 그녀의 미소와 기운을 싱싱하게 부활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약속 장소인 돈가스집에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습관처럼 메뉴판을 둘러보고 있었다. 돈가스 외에도 다른 메뉴가 많았지만, 돈가스 가스나는 분명 돈가스를 주문할 것이다. 짤그랑거리는 출입문 소리와 함께 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메뉴판을 내려놓고 오른손을 공중에 두세 번 깃발처럼 휘저으면서 자신의 위치를 GPS처럼 알렸다.
“웬일이냐. 작가 선생. 싫어하는 돈가스를 먼저 먹자고 하고. 그새 식성이 바뀌었어? 이젠 편식 안 하나?”
그녀는 내가 진심으로 돈가스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아니면 나를 놀리는 재미에 맛을 들였다거나. 오늘은 나의 돈가스 사랑이 내 본질이자 정체성이었음을 그녀에게 위풍당당하게 뽐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싫어하긴, 나 사실 ‘돈가스 마니아’라니깐. 그날만 ‘돈가스 아니야’였고.”
말 같지도 않은 말장난에 그녀가 피식하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가벼운 웃음이었지만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니깐. 난 돈가스 사랑을 과시하기 위해 왕돈가스를 시켰고 그녀는 평소대로 치즈돈가스를 주문했다. 어색한 공기로 미리 배를 채우지 않기 위해 돈가스가 준비될 동안 계속 그녀에게 이런저런 말을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마구 건넸다.
“이번 중간고사, 너가 동기 중에서 1등이더라?”
“당연한 거 아니야? 작가 선생은 몇 등인데?”
“난 중간은 간신히 넘겼지. 중간고사라는 취지에 맞게. 중간만 넘기면 통과하는 시험이 중간고사 아니야?”
“흥. 웃기시네.”
그녀가 기말고사의 취지까지 물어볼까 봐 내심 걱정했으나 다행히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 일단은 중간고사에서 어설픈 말장난은 커트가 되었다. 기말이라는 말로는 도무지 말맛을 살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침묵의 공기가 다시 살포되기 전에 무슨 말이든 재빨리 생각해 내서 뱉어야 했다.
“그때 캔 커피 잘 먹었다. 미지근하긴 했지만.”
바보 같은 놈. 그냥 잘 먹었다고 하지 굳이 미지근했다는 촉각적 심상으로 그녀의 정성을 깎아내릴 필요까진 없었는데. 이 자리에서는 진지함과 담백함보단 농담과 허풍을 쳐대야 내 속마음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을 거라는 방어기제가 작동했던 탓이다. 물론 그녀의 환한 웃음을 보고 싶었던 게 가장 큰 이유이긴 하지만.
“작가 선생, 솔직히 말해봐. 집에서 반찬 투정하다가 아빠한테 맞아본 적 있지?”
“어떻게 알았어? 소시지 없다고 투정 부리다가 아빠가 날리신 젓가락이 머리에 꽂혀서 응급실 실려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그때부터 내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기도 하구.”
“젓가락이 아니라 숟가락으로 맞았으면 천재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깝네.”
“숟가락으로 맞았으면 난 이미 기발하게 죽는 법에 대한 천재성을 인정받아 저승사자로 초고속 임용되었겠지. 아니면 니 앞에 앉아 있는 내가 진짜로 저승사자일지도 몰라.”
“작가 선생이 정말로 저승사자라면 나 좀 저승으로 데려가 주라.”
저승으로 데려가 달라니. 농담일까, 진담일까. 저승사자라는 말을 괜히 꺼내서 마음 한 켠이 괜시리 무거워졌다. 분위기 좋자고 꺼낸 말에 오히려 내가 상처를 받아버리는 이 모순적인 상황.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작가 선생, 방금 내가 한 말을 설마 진담처럼 받아들이는 거야? 사람이 순수한거야, 센스가 없는 거야? 앞으로 순수 문학의 거장이 되겠네. 사람이 이렇게 융통성이 없냐? 농담이라고, 농담.”
그녀와 나는 물리적인 시간상으로 동갑이 확실했지만, 왠지 정신학적으로 그녀는 나보다 몇십 년의 세월을 더 살아온 듯 어딘가 성숙한 면이 있었다. 일찍 어른이 되어버렸달까. 이젠 그녀도 어색한 기류를 깨고자 하는 나의 노력에 동참하고 있었다.
“요즘 둘기네집에 글이 뜸하드라? 이젠 카푸치노 말고 아메리카노나 카라멜마끼아또 같은 글들 써 볼 생각 없어?”
실제로 시험 기간도 있고 해서 학과 방명록인 둘기네집을 소홀히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보다 더욱 반가운 것은 그녀는 분명 내 ‘카푸치노에 대한 단상’을 읽었고, 꼬리 글도 정성스레 남겼고, 캔 커피를 건넨 사실이다.
“아니, 다음은 돈가스에서 영감을 얻어서 써 보려고.”
“오, 돈가스 기발한데? 궁금하다. 돈가스를 어떻게 사랑과 연관 지을지.”
왜 그녀는 내가 돈가스를 굳이 사랑과 연관지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내가 오로지 사랑에 미친 놈처럼 보였을까. 아니면 지금 그녀의 삶에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가 혹시 사랑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그녀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란 말에 집착하다 보니 또 어색한 기류가 슬슬 기어 나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먼저 온 손님들 때문인지 우리의 돈가스는 영 출하할 계획이 없어 보였다. 그럼 이제 마법을 부려야겠다. 가방을 열어 미리 준비한 트릭 카드 세 장을 꺼냈다.
“봐봐. 세 장의 카드가 있어. J(잭)♥, Q(퀸)♥, K(킹)♥.”
“어쭈? 이거 지금 마술이야?”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동물원 원숭이를 보는 듯한 관심을 내비쳤다. 일단 무시하고 준비한 멘트를 이어갔다.
“자, 이제 카드를 뽑을 건데, 넌 여자니까 Q(퀸)♥을 뽑아야돼.”
하면서 Q(퀸)♥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Q(퀸)♥가 트릭 카드이기 때문이다. Q(퀸)♥를 뽑는 순간 마법은 시작된다. 어서 시키는 대로 뽑아라. 애써 준비한 마술 망칠 생각하지 말고.
“다른 거 뽑고 싶은데? K(킹)♥ 뽑을래.”
“안돼. 넌 여자니까 Q(퀸)♥ 뽑아야돼.”
“이건 마술이 아니라 사기네. 오케이. 알았어.”
어색한 연출이었지만 그녀라는 환상적인 도우미로 인해 우리의 장면은 더욱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대신 카드를 뽑고 나서 일단 확인하지 말고 Q(퀸)♥를 테이블에 살포시 엎어놔. 그림 안 보이게.”
“시나리오대로 하려고 애쓴다 애써. 그래. 당해줄게. 재미없기만 해봐.”
그녀가 뭐라 하든 그냥 무시하면 됐다. 그만큼 이 마술은 중간에 마술인 걸 알아채도 마지막 결말부에서는 놀랄 수 밖에 없는 폭발력이 있으니까. 그녀가 놀라지 않는 변수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나 변수남은 오늘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마법을 그녀에게 선물할 것이다. 그녀는 Q(퀸)♥카드를 뽑아서 테이블에 살포시 엎어 놨다. 나는 그녀가 뽑아서 엎어 놓은 카드 위로 주문을 거는 척 지그시 손을 뻗었다.
“자, 이제 나는 니가 뽑아 놓은 Q(퀸)♥카드에 주문을 걸어 볼 거야. 내 마음을 이 카드에 텔레파시처럼 전해 볼게.”
주문을 거는 마법사처럼 나름 진지한 얼굴을 하며 손을 부르르르 떨어가면서 내 맘속에 저장되어 있는 메시지를 카드로 전달했다. 그녀는 내 사기 행각이 재밌었는지 일요일 아침에 방영하는 만화 영화를 보고 있는 어린아이의 눈빛을 하고 내 모든 행동과 언어에 빠져들고 있었다. 주문은 끝났다. 사기 행각을 마친 나는 그녀에게 이제 카드를 확인해보라고 거만을 섞어 명령했다.
“자, 이제 카드를 너가 뒤집어봐.”
“보나 마나 뻔하네. Q(퀸)♥이, J(잭)♥이나 K(킹)♥으로 바뀌어 있겠지. 예상된다. 예상돼.”
그녀는 카드를 뒤집더니 갑자기 집에 계실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엄마!!! 이게 뭐야.”
그녀가 뒤집은 카드에는 ‘Q(퀸)♥’ 그림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하얀 백지에 검은색 네임펜으로 쓴 나의 손글씨가 정성스럽게 한 글자 한 글자 적혀 있었다.
‘넌 웃을 때가 제일 예뻐.’
참으로 닭살 돋는 멘트이긴 하지만 속살 같은 내 진심이었다. 이런 허접한 마술을 통해서라도 그녀의 잃어버린 웃음을 마법 같이 되찾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카드 속 내 메시지를 확인하고 봄바람 같이 살랑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잠시 무슨 생각에라도 빠진 듯 고민하다가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어 무언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지만,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기 때문에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일단 내 마술에 대한 반응이 제일 궁금했기 때문이다. 메모를 마친 그녀는 수첩을 도로 가방에 넣은 후 드디어 내가 고대하던 반응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넌, 정말 따뜻한 아이야.”
밝은 웃음보다 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부드러운 미소와 감정 가득 담은 눈빛이 주는 차분한 웃음, 그 어떤 웃음보다 빛나고 황홀하게 내 마음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웃는다는 건 신이 인간에게 주신 따스한 선물 같은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던 찰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돈가스가 널찍한 접시에 담겨 나왔다.
이후에도 그녀와의 돈가스 데이트는 몇 번 더 이어졌다. 그녀가 됐든, 내가 됐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물 한 잔을 반드시 마셔야 하는 건강한 일과처럼, 자연스럽게 돈가스집 약속을 잡고 돈가스집에서 돈가스를 썰며 마음의 부족한 영양분을 채워갔다. 그녀는 예전보다 한결 밝아진 표정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만나온 동네 친구처럼 우린 스스럼 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서로에게 서로가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만남의 반경은 더욱 넓어져 우린 영화관에서 가끔 영화도 즐겼다. 우리의 영화 취향은 비슷했다. 영화의 결말을 누군가에게 스포 당하는 것은 너무 불쾌한 일임을 우린 뜨겁게 공감했다. 보고 싶었던 최신 영화가 개봉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개봉 당일에 가서 영화평론가처럼 진지한 자세로 영화를 관람했다. 관람 후에는 인적이 드문 동네 카페에 가서 초보 평론가들의 어리숙한 영화평론회를 열었다. 1회차 관람이라 영화 속에 담긴 주제 의식이나 메타포, 미장센 등을 완벽히 파악할 순 없었지만,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보완해가며 우린 우리만의 추억이 담긴 영화 평론을 완성했다. 그렇게 우린 풋풋한 스무 살이 만들어가는 일상의 추억들을 서로의 기억이란 앨범 안에 차곡차곡 담아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