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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Apr 18. 2024

<문-나잇> 2화

문나잇, 굿나잇

 문나잇과 편의점에서 술자리를 마친 후 우린 하숙방에 돌아와서 나란히 누웠다. 정말 나랑 원나잇을 할 작정이었나 보다. 문나잇은 대기층까지 기분이 붕 뜬 상태였고 내 기분은 심연으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한동안 서로 말없이 눈을 감은 채 어색한 침묵을 이어갔다. 어색한 기류를 먼저 깬 건 문나잇이었다.


“야, 뭔 말이라도 해봐. 벙어리로 진로를 바꿨어?”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말 뱉은 걸 보니 아직 벙어리 되기는 글렀구만. 내 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냐?”


 충격적이었다. 편의점 앞에서 튀어나온 문나잇의 발언은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 차마 상상할 수 없는 말이었고 상상하기도 싫은 말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변수와 변인이 우리의 삶을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이끈다고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문나잇은 오늘 밤 세 번째 변수를 가지고 날 찾아온 것이다.


“명절 끝나고 천천히 타이밍 한 번 잡아보려고. 조급하게 접근했다간 오히려 일을 망칠 수 있으니.”


 녀석은 날 얼마나 신뢰하기에 이런 말을 쉽게 흘리는 것일까. 나였으면 상상도 못 했을 상황이다. 나만의 은밀하고 소중한 감정을 남에게 이리 쉽게 말할 수 있는 건 용기일까. 두려움이 없는 걸까. 아니면 그만큼 성공에 대한 자신이 있다는 것이겠지. 나의 마음을 녀석에게 들키기 전에 어떤 식이라도 대꾸가 필요했다.


“잘 될 거다.”


 영혼이 없는 대꾸를 녀석에게 꽂아 주었다. 녀석은 힐끔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옅은 웃음을 지었다. 문나잇은 얼마만큼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 걸까. 아니, 나는 얼마만큼 선주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동안 선주를 향한 나의 마음은 명확히 정의 내리기가 어려웠다. 역설일지 모르겠지만 오늘 밤 문나잇의 말을 통해 내가 선주를 좋아하고 있다는 게, 어쩌면 이 마음이 사랑일지도 모르겠다는 게 명확해졌다. 문나잇이 선주에게 사귀자고 고백해보겠다는 말은 내 심장을 덜컹 내려앉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 내가 외모가 딸리냐, 성격이 딸리냐, 말발이 딸리냐. 잠자리가 딸리냐. 나한테 넘어 오지 않는 여자는 거의 전무후무하지. 내 가치를 알아주는 건 너밖에 없다. 친구야.”


 오늘 밤 문나잇이란 가치는 그냥 쓰레기에 불과했다. 어떻게 여자와의 잠자리가 본인의 가치를 높여 주는 요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 문나잇한테 수도 없이 원나잇 이야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난 단 한 번도 문나잇이 더럽다는 생각까진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 밤 문나잇은 그저 쓰레기로만 보였다. 여색을 밝히는 쓰레기 같은 자식. 여자를 욕구 충족의 도구로만 보는 형편없는 자식. 이젠 문나잇의 말에 대꾸조차 하기 싫었다. 그때 문나잇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내려앉았던 내 심장을 더 아래로 꾸욱 눌러버렸다.


“변수남. 넌 선주 어떻게 생각하냐?”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도 모르게 대꾸를 해버리고 말았다. 대화의 주제는 문나잇과 선주였는데 갑자기 변수남과 선주로 전환되었다. 문나잇의 말은 어떤 의도성을 감추고 있을까? 자신이 고백하려는 여자가 고백해도 될 가치가 있는 여자인지 내 입을 통해 확인받고 싶었던 걸까? 정확한 의도를 모르니 대답도 신중해야 했다. 무엇보다 선주를 향한 나만의 비밀스러운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불쑥 튀어나오지 않게 감춰야 했다.


“정선주 어떻게 생각하냐고.”


“뭐, 외모도 나쁘지 않고 성격도 괜찮은 것 같은데?”


 1인칭 주인공 감정을 배제하고 3인칭 관찰자 감정으로 답변했다. 아마도 그녀를 한 번이라도 겪어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나처럼 말했을 것이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답변을 하기가 곤란했고, 일일이 대꾸를 해주기도 싫었다. 정선주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었다. 문나잇의 입에서 그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 심장에 아픈 바늘이 한 개씩 꽂히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아려온다. 앞으로 몇 개만 더 꽂히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걔는 잠자리에서 어떨까?”


“야! 그만해.”


 아뿔싸.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말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의식적으론 통제가 안되는 무의식의 영역이 불쑥 예고편도 거르고 갑자기 튀어나와 버리는 걸 나로선 막을 방법이 없었다. 나의 사자후는 문나잇의 음란한 사상을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문나잇도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람과 기쁨이 공존한 표정이었다. 1등 성적표를 받아온 아들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는 아빠의 미소를 지으며 문나잇은 내 머리를 살살 쓸면서 어루만져 주었다.   


“고백해. 자식아.”


“뭐?”


 누구한테 고백하라는 거지? 고백의 객체가 누구란 거야? 예상치 못한 문나잇의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누구긴 누구야? 나한테도 고백하고, 선주한테도 고백하고. 너 선주 좋아하지? 얼른 자백해. 변소남이.”


“야, 너 어떻게…….”


“으이구, 등신아. 내가 그렇게 같이 밥 먹자고 할 때는 쿨하게 잘도 거절하더니 선주랑은 아주 밥만 잘만 먹고 다니더라? 그리고 걔랑 밥 먹고 오면 늘 뭔가에 홀린 듯 미친놈처럼 넋이 나가 있고. 니가 선주 좋아하는 걸 모르는 사람이 바보 아니냐?”


 나도 몰랐던 사실을 문나잇은 훤히 꿰뚫고 있었다. 문나잇과의 대화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다른 놈이 낚아채기 전에 너가 먼저 고백을 해라, 뻔히 애만 태우고 있다가 놓치기 전에 얼른 고백해라, 선주도 너에 대한 호감이 어느 정도 있어 보인다, 우물쭈물 속만 끓이고 있을 거 같아 내가 답답병 걸릴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다, 등 문나잇은 연휴에도 쉬지 않는 연애 상담사가 되어 선주를 향해 내 안에 복잡하게 뭉쳐있던 감정의 덩어리들을 시원하게 풀어헤쳐 주었다. 문나잇은 내가 선주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대충 알고는 있었고, 그래서 내 진심을 떠보기 위해 본인이 선주를 좋아한다는 새까만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문나잇은 과에서 혼자 겉도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 준 친구였고, 날 붙들고 여기저기 맛집 탐방을 하며 세상엔 하숙집 밥 말고도 맛있는 밥이 많다는 걸 직접 알려준 친구였다.  


 문나잇은 괜찮은 사람이자 진정한 친구라는 감정이 내 마음속에 잔잔하게 스며들었다. 사랑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런 감정을 우정이라고 하는 걸까. 살아오면서 우정이란 감정은 내 인생과는 거리가 먼, 낯선 광야의 깊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는데 오늘 밤 난 드디어 인생 처음으로 우정이란 이름의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문나잇과 원나잇을 하고 나자 어느새 새벽녘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문나잇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내 옆에 문나잇이 함께 누워 있다는 게 너무 든든했다. 이 친구와 함께라면 삶이란 절대 외롭지 않을 것이고 어떤 난관이 와도 이겨낼 것만 같은 용기를 얻을 것이다.


‘문나잇, 굿나잇.’


 마음속으로 문나잇이 잘 자길 기도했다. 그리고 문나잇과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 명절이 끝났다.

 

 문나잇은 명절의 마지막 날 밤, 공기가 통할 만한 모든 방문과 창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채 스스로 번개탄을 피웠다. 어떤 유서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문나잇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나에게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녀석은 자신의 별명을 너무 사랑했는지 달 밝은 밤, 문나잇에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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