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토요일이었다. 문나잇을 통해 애써 감춰왔던 내 마음의 깊은 속살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그녀를 보고 싶다. 진지하게 만나고 싶다. 지인이 아닌 연인으로, 친구가 아닌 애인으로 그녀에게 가까이 닿고 싶었다. 닿을 수 없는 변수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그저 오늘의 난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에게 닿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문나잇의 조언은 우물쭈물하고 있던 내 마음밭에 용기와 자신감이라는 양분을 심어 주었다.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사실 나조차도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난 그녀를 너무 좋아하고 있고 그녀에게 더 다가가고 싶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에게 내 마음을 솔직히 고백하는 편지를 써 보기로 결심했다. 박력 있는 말로 고백할 수도 있었겠지만 스무 살의 변수남은 말보다는 글이 더 편했고, 은밀한 감정을 전달하는 데에는 말보다는 글이 더 어울린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다.
명절이라 편지지를 팔만한 곳이 있을까, 하는 사소한 염려를 안고 외출을 했다. 다행히 동네 작은 팬시점이 문을 열었다. 명절인데 영업을 결심한 사장님께 진심으로 경의의 마음을 표하고 싶었다. 부끄러운 사랑 고백이란 주제 의식과 가장 잘 어울리는 듯한 풍경이 그려진 편지지를 고른 후 필기감이 좋아 보이는 볼펜도 하나 집어 들고나서 카운터로 향했다. 명절에 특별 근무를 서서 얼굴에 화가 잔뜩 그려진 직원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이천 원을 지불했다. 편지지를 소중히 감싸 안고 내 방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아 편지지의 비닐 포장을 조심스럽게 뜯었다. 어떤 말로 스케치를 해야 고백이 성공할까 한참을 고민한 후 중언부언할 바엔 그냥 내가 느끼고 있는 현재의 거짓 없는 감정을 솔직하게 펜에 담아 보기로 했다. 가식보다는 진솔함으로 다가가는 거다.
명절이 끝나고 여유 있게 준비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한창 타오르고 있는 감정에 그저 순응하고 싶었다. 물론 조급한 마음도 일정 섞여 있기도 했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 진실은 반드시 통하게 되어 있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내쉬고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여과 없이, 진지하게 고백해 나갔다. 대략 요약하자면.
기- 너와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던 등나무 벤치에서의 상황.
승- 돈가스, 영화 데이트를 통해 커져만 가는 너에 대한 미묘하고 야릇한 감정.
전- 이 감정이 결국 너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라는 걸 깨달음.
결 –내 마음을 받아준다면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인 9월 26일 PM 7:00, 대학 후문 쪽 미르연못으로 나와줄 것!
ps) 나오든 안 나오든 절대 먼저 연락하지 말 것! 이 감정 그대로 미르연못에 가져가고 싶음. 안 나온다면 너에 대한 모든 감정을 미르연못에 미련 없이 버리고 오겠음.
편지를 다 쓰고 나니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편지를 전해주려면 일단 만나야 하는데 명절 연휴 기간 동안 그녀가 나올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덜컥 편지부터 써버린 것이다. 그만큼 불타오르는 감정이 차가운 이성을 지배해서 일의 순서가 꼬여 버렸다. 너무 급작스럽게 일을 추진해 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함이 약간 엄습했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왕 용기 낸 거 그냥 밀고 나가기로 했다. 그녀에게 오늘 저녁에 잠깐 볼 수 있냐고, 줄 게 있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무심한 듯 건조하게 보냈다. 뭐 명절이니까 가정 행사가 있을 수도 있고 굳이 오늘이 아니면 명절 끝나고 천천히 봐도 되겠지, 라고 맘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에게서 수락의 답장이 흔쾌히 돌아왔다. 당장 오늘 저녁에 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보자고 한 녀석이 오늘 보자는 답변을 받았는데 심장은 마치 거절의 답변이라도 받은 듯 괜시리 떨려왔다. 하지만 기왕 용기 냈으니까 나의 선택과 결정에 확신을 가지기로 했다. 이미 뭃은 엎질러 졌다. 그녀와의 좋은 추억들만 떠올리면 왠지 힘이 났다. 일종의 최면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내 글에 남긴 그녀의 꼬리글, 돈가스 데이트, 영화평론회 등등 포근한 기억들을 떨리는 심장 속으로 마구 부어넣었다. 저녁 7시에 영화평론회를 자주 했던 동네 카페에서 보자는 내용의 답장을 그녀에게 보냈다.
어느덧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이 가까워져 왔다. 문밖을 나서서 가까운 동네 마트에 들러 벽돌처럼 진열된 명절선물 세트를 하나 구매한 후, 편지 봉투를 선물 세트 깊숙한 곳에 끼워 넣었다. 선물 세트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기분 좋은 부담감으로 땅을 두드렸다. 약속 장소에 거의 다다를 무렵,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준비한 각본들이 모두 백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애써 떠올려 봐도 도무지 기억이란 녀석은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다. 평소처럼 하자.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퉁명스럽게, 자연스럽게 그녀를 대하면 되는 일이다. 오히려 준비된 각본은 우리의 장면을 더욱 어색하게 할 수도 있다. 불현듯 튀어나오는 감정의 애드립이 가끔 명장면을 탄생시키기도 하니까.
카페의 문을 열자, 평소처럼 수수하게 차려입은 그녀가 먼저 와서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저번에 마술을 보여줬을 때도 수첩에다 뭔가를 끄적거렸던 것 같은데.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녀는 쓰고 있던 수첩을 가방 속에 얼른 집어넣고 가벼운 미소로 날 맞이했다. 최대한 쿨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대범하게 앉은 후 무심한 척 선물 세트를 건넸다.
“이거나 받아라.”
“뭐냐, 이거……. 식용유?”
아무 계획도 없이 그저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 온 것이 하필 식용유 선물 세트였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에 한심함을 더해 선물 세트와 나를 번갈아 응시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서로를 대하는 말투가 예전보다 친근하게 꼬여 있었다.
“그냥 오다가 길바닥에서 주웠어. 그거 가지고 지지든 볶든 너 알아서 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떤 의도를 정신머리에 탑재해야 계란 프라이도 제대로 못 만드는 나한테 식용유를 줄 수 있는 거냐?”
“계란 프라이도 못 만들다니. 처참하네. 어른이 주면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받는 거야.”
“많이 컸네. 작가 선생. 예전에는 누나 얼굴도 못 쳐다보던 게.”
서로의 진심을 비틀고 꼰 대화가 계속 오고 갔다. 편지가 담긴 선물 세트를 부모님께 그대로 갖다 바치면 낭패가 될 수도 있었기에 난 숨겨진 편지에 대해서는 각별한 주의를 주어야 했다.
“야, 그거 바로 부모님께 갖다 드리지 말고 니가 먼저 열어봐.”
“왜? 고백의 편지라도 몰래 넣어 놓으셨나?”
뜨끔, 하고 심장이 쫄았다.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녀의 예지력은 정말 점술가 수준이다. 아니면 내가 너무 순수한 바보이거나.
“그래, 부끄러운 고백이 들어있으니까 꼭 너 혼자 봐라.”
“설마 커밍아웃 고백은 아니지? 그럼 정말 충격적인데. 작가 선생.”
“커밍아웃보다 더 충격적인 고백이니까 보고 놀라지나 마.”
“오, 그러니까 더욱 보고 싶어지네. 작가 선생, 지금 보면 안 돼?”
“안돼. 집에 가서 꼭 혼자 봐.”
“막상 까보니까 정선주 바보, 따위가 써져 있으면 가만 안 둬.”
“정선주 바보보다 더 충격적일걸?”
“오케이, 오케이. 알았어. 작가 선생.”
그녀는 복돈을 받는 어린아이의 만족스러움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촬영 현장에서 대번에 오케이 사인을 내는 영화감독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끄덕임이 내 고백에 대한 오케이 사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내 허락도 없이 카라멜마끼아또 두 잔과 이름 외우기도 힘든 조각케이크 한 개를 주문했다. 우린 마주 앉아 지난 추석의 일상을 공유하며 평소처럼 웃고 떠들어 대며 한적한 카페의 빈 공간을 채웠다. 물론 문나잇과 있었던 일들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대화 중 오간 대부분의 웃음은 그녀의 차지였다. 난 웃는다는 것에 별로 소질이 없었고, 크게 웃으면 하회탈 눈매와 벌어진 앞니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더욱 못생겨지기 때문이다. 그녀가 던진 농담에 조용한 미소로 답해주는 것, 그것이 나에겐 최선의 함박웃음이었다.
"작가 선생, 경주 가 본 적 있어?"
"갑자기 경주는 왜? 예전에 수학여행 때 한 번 가보기는 했지."
"그렇군."
"경주에 가고 싶어?"
"뭐, 가고 싶다기보다는 뭐랄까, 그곳엔 죽은 영혼들이 자유롭게 떠다니지 않을까?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사람구경도 하고 재미 삼아 사람들을 놀래키기도 하고."
"취향 특이하네. 사람들 놀래키는 귀신들이 부러운 거야?"
"귀신이 아니라 영혼 말이야. 거기엔 무덤들이 많으니까 영혼들도 많을 것 같은데. 그들은 순간 이동도 하고 그러겠지? 사람 몸속에도 들어갔다 나올 수 있나?"
"그건 죽어봐야 알겠지. 난 안죽어봐서 잘 모르겠다."
"치, 대답에 영혼이 없어."
"당연히 영혼이 없지. 난 아직 살아있으니까. 죽어야 영혼이 슝,하고 몸에서 빠져나가는 거 아니야?"
"됐다. 너랑 말 섰은 내가 바보지."
"경주 가고 싶어? 같이 가 줘?"
"아니, 언젠간 갈 일이 있겠지. 그만 신경 끄세요. 무미건조한 작가 선생."
그녀와 이것저것을 놓고 떠들다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카페에서 나와 그녀를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줬다. 마침 그녀의 집쪽으로 향하는 버스가 도착했고 그녀는 명절 선물 세트를 품에다가 소중히 안고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창밖에 서 있는 날 바라보며 유리창에 호, 하고 입김을 불어 희미한 성에를 만든 후, 오른손 검지로 보란듯이 손낙서를 끄적거렸다.
‘변수남 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