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찬바람이 공기에 섞이어 하나둘씩 긴팔을 찾아 입는 추석 즈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방 속의 지방인 시골 도시에 사는 동기들에게도 슬슬 귀소본능,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것이 찾아와 각자 자신의 고향을 향해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집을 멀리 떠나와 대학교에 와보니 막상 이벤트 때마다 집에 가는 것이 솔직히 귀찮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갈 집이 없었다. 내가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노후의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이사를 가신 후 작은 반지하방을 구하셨다. 아무래도 나이도 있으시고 살고 있던 도시에서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께선 어지간히 그 도시를 싫어하셨나 보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그 도시가 주는 황량함이 싫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갔다. 어찌 됐건 그곳과 그 시절은 아버지를 나락으로 밀어 넣은 공간과 시간이었으니. 결국 난 추석에도 계속 하숙집에 남기로 했다.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눈치 아닌 눈치를 주셨지만, 난 염치없는 걸 택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지금은 아버지보다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조금은 더 편한 존재였으니까. 눈칫밥은 얼마든 먹을 수 있다. 불효자는 어머니께 미리 연락을 드려 있지도 않은 거짓말을 꾸며 내며 이번 추석에 서울로 올라가기 힘들 것 같다고 통보했다.
쓸쓸한 가을바람이 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다. 추석에 집에도 못 가는 내 신세를 생각하니 외로움이 밀려 왔다. 낯선 지방에서 남의 집에 얹혀 홀로 대학 생활을 해 나가는 것, 명절에 돌아갈 집이 없다는 것 등의 이유도 있겠지만, 당장 느끼고 있는 외로움의 근원적인 이유는 못 되었다. 사실 못 가는 게 아니라 안 가는 거였지만, '안'이든 '못'이든 난 타지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존재라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명절 연휴 동안 하숙집에 남아 있는 하숙생은 오로지 나 하나였다. 주인아주머니께서는 명절 당일에만 남편과 함께 여수에 있는 시댁에 일박 이일 일정으로 다녀올 계획이라고 하셨다. 밥은 전기밥솥에 여유 있게 지어놨고, 주방 냉장고에 명절 음식도 몇 개 만들어 넣어놨으니 혼자 알아서 챙겨 먹을 수 있겠냐는 걱정을 던지셨지만, 난 걱정 따위 집어넣으셔도 됨다며 주인아주머니를 안심시켜 드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해하는 상황이 연출되었지만, 어찌 보면 미안함이란 감정보다는 안도의 마음을 주고받은 것 같았다. 난 주인아주머니 눈칫밥을 안 먹어도 되고, 주인아주머니 역시 빈집을 지키는 충직한 수컷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충직한 수컷에게 명절 당일이 찾아왔다. 주인아주머니는 시댁이란 정말 가기 싫은 곳이야,라는 표정을 대놓고 남편에게 드러낸 채 손수 장만한 음식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여수로 떠나셨다. 충직한 수컷은 자신의 골방에서 탈출하여 주인님의 드넓은 거실 속 안락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리모컨도 다룰 줄 아는 영리한 수컷이라 TV를 켜고 바보상자 안에서 송출되는 다양한 영상들을 바보같이 침을 흘리며 그냥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추석 특집 예능, 추석 다큐멘터리, 추석 특선 영화 등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추석이라는 대주제 속에 묶여 개성을 잃은 채 방영되고 있었다. 밖을 내다보니 아침부터 열일이었던 둥근 해는 오랜 근무를 마치고 퇴근 채비를 서서히 하고 있었다.
수컷은 더 이상 바보가 되기 전에 TV를 꺼 버리고 자신의 골방으로 올라가 책꽂이에 보관된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문학에 대한 사명감이나 의무감 비슷한 감정으로 구매했던 <상실의 시대>라는 책이었다. 예전에 일단 사놓고 야심 찬 독서의 항해를 시작하려다가 어마어마한 교과 숙제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난파되고 만 책이었다. 잊힐 뻔했던 난파선은 오늘 운명처럼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상실의 시대>라는 책 제목은 내 삶의 어두운 단면을 공감해 주는 듯했다. 국가와 아버지에 의해 상실된 나의 소중한 꿈, 평범한 가족 일상의 상실, 그리고 누군가에 빼앗겨 버린 나의 마음.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와 내 삶을 채색할까? 책을 읽겠단 생각은 어느새 백지처럼 사라지고 난 자꾸 ‘상실’이란 단어에 초집중을 한 상태로 뇌가 아닌 마음에게 브레인스토밍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의 브레인스토밍을 멈추게 한 건 뜻밖에도 핸드폰 진동음이었다. 폴더폰을 젖히니 따끈한 문자메시지가 막 도착해 있었다. 대학 동기 문나잇이었다.
‘시골에는 잘 내려갔냐? 형은 심심해 죽겠다. 시간 되면 이따 밤에 스타 한 판, 콜?’
문나잇은 이곳이 고향인 토속 현지인이었다. 나하고는 참 결이 다른 인간인데 오히려 정반대가 끌린다는 말이 있듯이 나와 문나잇은 누가 친해지라고 시킨 것도 아니지만 시나브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었다. 성향상 내가 먼저 다가간 것은 아니었고, 문나잇은 나에게 무언의 매력을 느꼈는지 먼저 다가와 교제의 물꼬를 직접 텄다. 문나잇은 나의 음습한 삶의 지면에 마른 빛을 쬐어주는 존재처럼 나만의 골방에서 밝은 세상을 향해 직접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 주는 친구였다. 타지 생활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에도 문나잇의 지분이 꽤 있었다. 내 친구 문나잇이 꽤 간절해 보이니 얼른 답장을 보내주었다.
‘시골은 안 가고 하숙집 골방에서 골골거리며 썩어가는 중. 어제도 원나잇 성공?’
문나잇은 사실 원나잇에 중독된 친구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더럽고 호색한 변태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난 왠지 문나잇에게서 더러움이란 말보단 외로움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문나잇은 불특정 다수의 여성과 원나잇에 성공했을 때마다 그날의 잠자리에 대해서 박진감 있는 목소리로 영웅담을 들려주듯 떠들어댔지만, 난 그 때마다 문나잇이 결코 기쁘다거나 행복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진짜 감정과 본질을 애써 감추려 하고 있다는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문나잇의 비밀스러운 원나잇 이야기를 늘 정성스럽게 청취해 주는 애청자였다.
‘정말? 이거 완전 호재인데? 내가 당장 달려간다. 원나잇 얘기는 직접 만나서 현장감 있게.’
녀석은 어제도 정체 모를 여자와 원나잇에 성공한 것일까? 문나잇에게 하숙집 주소를 적어 전송했지만, 녀석에게선 집 주소 따위는 필요 없고 학교 후문에서 보자는 답변이 일방적으로 돌아왔다. 하긴, 녀석이 집배원도 아니고 일반 가정집 주소를 제대로 찾아올 리가 없지. 막 버스를 탔고, 20분 정도 걸린다는 녀석의 문자메시지를 받자마자 나도 슬슬 하숙집에서 굼벵이처럼 흐물흐물 기어나갔다. 명절 당일이라 그런지 밥집이든 술집이든 문을 연 곳이 거의 없었다. 저마다 피난을 떠났는지, 피서를 떠났는지 거리엔 사람들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았다. 한적한 거리가 주는 상쾌함.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황홀한 고독이었다. 경쾌하게 발걸음을 굴려 가며 미끄러지듯 번화가를 벗어나 학교 후문 앞에 도착했다.
문나잇을 태운 버스는 아직 도착 전이었다. 잠시 후 버스 한 대가 검은 매연을 내뿜으며 학교 후문 근처 정류장에 멈춰 섰다. 버스 뒷문이 열리자 문나잇이 지상보도블록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치 포승에 묶여 법무부 호송버스에서 내리는 피의자같이 문나잇의 발걸음은 왠지 모르게 무거워 보였다. 문나잇은 날 발견하자마자 이마에 손날을 붙이는 특유의 손인사를 날리며 다가왔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문나잇의 웃고 있는 얼굴 안엔 왠지 슬픔도 한 스푼 섞여 있는 듯했다. 쾌락과 유흥이란 세계에서 여러 차례 모범 시민상을 수상했을 것 같던 문나잇에게 슬픔이란 정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만사를 즐거움이란 뚜렷한 목표 안에 때려 박으며 치열하게 살고 있는 문나잇. 그 슬픔의 근원은 그때까지는 알 도리가 전혀 없었다.
“어이, 변소남이. 명절에 보니까 더욱 반갑네.”
녀석은 변소남이라는 내 별명이 썩 자기 취향에 맞았는지, 알코올선배의 뛰어난 작명 센스에 감동받았는지, 내게 변소남이라는 타이틀이 생긴 이후 줄곧 나를 그렇게 불렀다. 어차피 나도 문나잇의 실명 대신 문나잇이라는 기괴한 별명으로 부르니 피장파장이었다. 오히려 서로의 치부를 노골적으로 공유한다는 점에서 우린 더욱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명절이라 원나잇을 못하는 문나잇을 보니 나 또한 더욱 쌤통이고 반갑구려. 친구.”
“벗이여, 어찌 그대는 인동초같이 고귀한 입에서 쌤통이란 천박한 말을 그리 쉽게 내뱉는가. 각설하고 오늘은 귀하신 몸께서 그대와 원나잇을 하러 이 먼 길을 손수 행차하지 않았는가. 이 밤을 나와 함께 찐하게 찢어보세.”
“남자랑 원나잇을 하겠다고 하니 상당히 애매모호한 감정은 드네만, 휘영청 달 밝은 밤에 문나잇과 함께 원나잇을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네.”
“자, 곧 적들이 쳐들어올 것 같다는 첩보가 들어왔네. 밀려오는 오랑캐들을 궤멸시키러 떠나 보세. 롸잇 나우.”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우린 자연스럽게 고어체를 섞어가며 붕우유신(朋友有信)을 가장한 헛소리를 지껄였다. 연중무휴 pc방에 입장하니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명절의 부랑자들이 즐겁게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문나잇과 나는 구석진 자리에 나란히 앉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적들의 진지에 쳐들어가기도 했다가, 대규모로 밀려오는 적들을 기가 막힌 전략과 전술로 파훼했다. 3시간 남짓의 전투를 6연승으로 마친 우리는 24시간 편의점에 들러 소주든 맥주든 안주든 있는 대로 골라 잡아들고 이젠 내 하숙집 골방으로 쳐들어갔다. 문나잇은 코딱지 만한 내 하숙방 규모에 적잖이 놀라다가도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이내 적응한 듯,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방바닥에 기댄 채 얼마 전 만났던 한 여성과의 원나잇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문나잇의 원나잇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늘 갖는 의문점이지만 어떻게 ‘원나잇’이라는 매번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이야기마다 다른 맛깔스러움으로 무쳐낼까 신기했다. 녀석은 확실히 나와는 정반대로 글 주변보다 말주변이 더 탁월해 보였다. 녀석의 원나잇 얘기는 별다른 가구 없이 텅 빈 하숙집 방의 여기저기를 요란한 인테리어로 하나씩 하나씩 채워주는 것 같았다.
술이 거의 떨어질 때쯤, 우린 아까 들렀던 24시간 편의점으로 술도 깰 겸 혹은 술에 더 취할 겸 역설적인 산책을 나갔다. 봉지 가득히 술과 마른안주를 채워 넣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나를 돌려세운 건 문나잇이었다. 아무래도 집까진 가긴 너무 귀찮다, 낭만적인 달빛 아래서 자연을 벗 삼아 꽃가지를 꺾어가며 마셔보자, 등의 이유를 나열하며 우린 편의점 앞에 놓인 초록빛 야외테이블에 새롭게 터를 잡았다. 초록빛 야외테이블에 앉으니 마치 싱그런 풀냄새 풍기는 자연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느낌도 약간 들었다. 우린 자연을 벗 삼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근사하게 떠오른 달빛 아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초원에 앉아 상쾌한 풀냄새를 맡아 가며 친한 벗과 운치 있게 잔을 나누는 정경은 문나잇과 나를 과거의 고풍스러운 정자로 안내하고 있는 듯했다.
술맛이 기가 막히다고 여기려던 찰나, 문나잇의 입에서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한마디는 나를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으로 강하게 밀어 버렸다.
고요했던 내 감정의 물결에 거친 파도가 들이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