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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May 09. 2024

엄마, 나 내일 어린이집에 안 갈래.

마흔다섯 살의 아빠가 여섯 살 아들에게 혼났다.

 나름 꼼꼼하게 점검했다고 자부했는데 예상치도 못한 부분에서 업무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 직원들의 잇따른 업무 과실 인해 예민함의 날이 바짝  있는 부장님을 뵐 면목이 도저히 없었다. 수습할  있는 일이었지만 벌써부터 혼날 걱정이 음습했다.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겸손한 태세로 이미 퇴근한 부장님께 무겁게 연락을 드렸다. 스마트폰 너머에선 오늘은 퇴근을 해버렸으니 내일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부장님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오늘 해결 볼 수 있는 일은 아니기에 스트레스를 그대로 싸매고 어깨가 축 처진 퇴근길에 나섰다. 힘없이 도어록을 풀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들내미들이 해맑은 미소로 달려오며 놀아달라고 엉겨 붙었다. 도저히 놀아줄 기분이 아니라 그 녀석들을 매정하게 어냈다. 스트레스는 부자의 정마저 이분법처럼 갈라놓았다. 못난 아비가 안 놀아주니 첫째와 둘째 녀석다시 그들만의 동심의 세계로 입장했다. 요리 중이던 아내가 저녁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며 철부지 세 남자를 식탁으로 호출했다. 4인 가족은 4인용 식탁에 오밀조밀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며 오늘 각자의 일상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째 아들은 낯선 환경에 비교적 잘 적응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아직 기역 발음보다 디귿 발음이 편한 여섯 살배기 둘째 아들이었다. 


"엄마, 나 내일 어린이집 안 래."


 선생님이나 친구들하고 별 탈이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아내가 취조하듯 캐물으니 둘째는 어린이집에서 배우는 공부가 힘들단다. 하긴 6살짜리 꼬맹이 입장에선 새롭게 배우는 국어영어, 수학 등이 나름 본인만의 인생 역경이나 스트레스겠지. 나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개괄하여 브리핑했다. 아내는 괜찮냐며 걱정의 시선을 던졌지만 난 퉁명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예민의 날이 바짝 서 있으니 오늘 밤엔 아무도 날 건들지 말라는 것마냥.


 식사가 끝나자 아내와 아이들을 외면하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서 똬리를 틀었다. 직장에서부터 집까지 따라온 스트레스도 내 옆에 나란히 누웠다. 내일 부장님께 혼날 염려가 바싹 옥죄어 왔다. 아빠는 침대에서 스트레스와 동침 중이고, 엄마는 주방에서 설거지와 씨름 중이라 첫째와 둘째는 지들끼리 거실에서 신나게 떠들어대며  온 집안을 들쑤시고 다녔다. 얼마나 시끄럽게 뛰어다니는지 자칫 층간 소음으로 아랫집에서 민원이 들어올까 봐 내심 걱정되었다. 키득키득, 하하호호. 깔깔껄껄, 쿵쾅쿵쾅, 우당탕탕. 내일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던 둘째 녀석이 오늘은 아주 신났다.


어?


내일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던 둘째 녀석이 오늘은 아주 신났다.


어라?


내일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던 둘째 녀석이 오늘은 아주 신났다.


아......


 고작 여섯 살배기 아들은 인생의 단맛쓴맛 매운맛 좀 봤다던 마흔다섯 살짜리 아빠에게 새로운 인생의 맛을 일깨워 주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계속 갖고 있어 봐야 시간만 파괴되고 삶에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나도 왈패가 되어 아들 녀석들이 창조한 동심의 세계에 합류했다. 못된 악당이 되어 자기들을 잡으러 와 라는 둘째 녀석부탁쯤이야 이젠 일도 아니었다. 암, 스승의 훌륭한 가르침에 제자로서 이 정도 보은은 해드려야지. 아빠가 함께 놀아주니 둘째 녀석은 더욱 신이 났는지 얼굴에 해맑은 웃음을 수놓았다.


오늘은 오늘만의 귀중한 가치가 있잖아. 네 감정이 짓눌렸다고 오늘의 시간마저 짓누를 거야?


내일 벌어질 일은 내일 직접 부딪혀 보는 거야. 혹시 알아? '괜찮아 잘 될 거야' 같은 하루가 될지.


질퍽한 진흙웅덩이에 곧 빠질 사람처럼,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지레짐작하며 쓸데없는 감정의 헛바퀴를 굴릴 필요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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