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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Jun 23. 2024

2024년에도 0원짜리 김밥은 잘 팔린다.

밥알이 몇 개고?

 남자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유독 나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전 여친'


 그렇다. 2008년에 만난, 처음이자 마지막 여친이 지금의 아내이다. 연애 초창기에 아내가 피크닉 김밥을 만들어 날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한다. 절대 잊지 못한다. 김밥에 대한 나의 편협한 사상이 발가벗기듯 조롱당하며 와르르 무너진 날이기 때문이다. 밥알보단 다른 속재료로 꽉 차 있는 김밥. 밥알 많은 김밥에 불만을 품은 누군가'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입니까.'를 부르짖으며 창조듯한 새로운 차원의 김밥. 그때 맛보았던 청양고추참치마요맛 김밥은 여전히 내 미각 한편에서 알싸하고 담백한 사랑의 맛으로 남아있다.(그렇다고 전적으로 그때 그 김밥 때문에 그녀와 결혼을 결심한 건 아니다. 정말 사랑해서 결혼했다. 진짜다. 물론 예쁘기도 했지만.)

고작 사진 따위로 아내표 김밥의 맛을 담아낼 수 없는 게 한스럽다


 오늘은 아들 2호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견학을 나가는 날이다. 미명이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이른 새벽녘. 아내의 초조한 잔걸음이 주방 곳곳에 바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황야를 가로지르는 증기기관차처럼 치익치익 딸깍딸깍 압력밥솥이 돌아가는 소리. 군데군데 영광의 상처가 나있는 오래된 나무 도마를 일정한 리듬으로 때리는 중식도의 묵직한 칼질 소리. 소나기가 억수로 퍼붓는 듯 프라이팬  위에서 김밥 속재료가 기름땀을 튀기며 요란하게 지져지는 소리. 


 김밥이 완성되기도 전에 이미 내 혀에서는 주방에서 전해지는 소리와 향기가 빚어내는 맛의 향연이 군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얼른 맛보고 싶은 생각을 수건처럼 두르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아내의 손엔 항상 방금 썬 듯한 김밥 한 덩이가 소중하게 들려 있다. 아내는 언제나 그날의 첫 김밥 조각을 남편의 입으로 쏙 하니 넣어 준다. 이 얼마나 지고지순한 사랑의 표현이란 말인가. 맛은 괜찮냐는 아내의 말에 무덤덤하게 고개만 끄덕거려 주는 무심한 남편. 사랑의 언어학 시간에 졸았거나 혹은 태생적인 내향성이 조음 기관을 억지로 마비시켰는지도 모른다.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밥은 2008년이든 2024년이든 여전히 찬밥 취급을 받고 있었다. 밥알이 자기 지분을 뺏긴 자리엔 큼지막한 김밥 속재료들이 대신 들어차 4월의 봄꽃같이 알록달록하게 김밥을 꾸미있었다.


 며칠 전에 칼 가는 분이 칼갈이 트럭을 끌고 예고도 없이 아파트 단지를 방문했었다. 평소 무뎌진 칼의 노래를 애절하게 불러왔던 아내가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칼갈이 트럭을 발견하자마자 날이 무딘 중식도와 집 안 여기저기 흩어진 지폐뭉치를 허겁지겁 들고 가더니 오천 원을 지불한 대가로 새로 태어난 번뜩이는 중식도를 가지고 돌아왔다.  덕분에 오늘은 옆구리가 안 터지고 아주 잘 썰린다며 아내는 먹기 딱 알맞은 크기로 김밥을 숭덩숭덩 조각내는 중이었다. 요리하는 사람만 안다는 희열과 쾌감이 이런 것일까?

몇 개고? 밥알 말이다. 몇 개고?

 체중 관리 한답시고 반 공기도 안 되는 밥으로 깨작깨작 아침 식사를 하는 남편이란 작자도 아내의 김밥이 나오는 날이면 김밥 두 줄을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혹시 남는 김밥 꽁다리가 더 있나 하며 배부른 돼지처럼 식탐을 부린다. 이 김밥 앞에서는 도저히 배고픈 소크라테스 행세를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배가 빵빵하게 차올라도 기어이 꽁다리 두어 개를 입안으로 마저 욱여넣고 무거워진 몸을 일으킨다.


 배는 물론이고 마음까지 빵빵하게 채워주는 아내의 김밥. '넉넉한 사랑'이라는 비싼 재료가 들어가 있지만 '당신의 사랑값'만 받겠다는 아내의 0원짜리 사랑의 김밥. 아마 아내에게 김밥이란 이런 의미가 아닐까?


'당신을 한 내 마음을 꽉꽉 채워 넣었어요. 사랑해요.'


받아먹는다는 건 참 편해. 그런데 말이야. 만들어 주는 사람의 땀방울은 닦아주고 먹는 거니?


고소한 정성을 흠뻑 바른 뒤  행복 양념으로 쓱쓱  버무린 후 기쁨, 사랑, 헌신의 속재료를 듬뿍 넣어  옆구리가 안 터지게 돌돌돌 꾹꾹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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