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소리 모으기 22. 자유와 부자유
우리는 모두 자유를 울부짖는다.
오랜 기간 인류가 추구해온 자유라는 개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그리고 마땅히 누려야 할 최상의 가치로 여겨진다.
내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도 당장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국가인 만큼, 우리 사회에서 ‘자유’라는 단어가 지니는 그 위상은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다. 당장 헌법만 보더라도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추구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따르는 세계 각국의 정부들도 자유의 존재를 긍정하고 모든 시민에게 자유를 보장해주고 있다. 역사만 보더라도 자유라는 가치를 위해 피흘려온 사람들이 어떤 희생을 했는지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국가 별 표어만 살펴보더라도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자유를 갈구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자유, 평등, 우애’(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를 국기에 나타낸 프랑스, 전쟁에서 ‘자유냐 죽음이냐.’(Ελευθερία ή θάνατος)를 외쳤던 그리스, ‘통일과 정의와 자유’(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를 노래하는 독일, ‘조국과 자유를 위하여 하느님의 도움으로’(Cum Deo pro Patria et Libertate)를 내세운 헝가리 등. 세계 각국이 자랑하는 슬로건 속에서 ‘자유’라는 단어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자신의 자유를 소중히하고 이것이 침해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아니, 원치 않는 수준을 넘어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악행이라고 규정할 정도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토론할 때도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논거를 내세우면, 그것에 대해 무어라 반박할 여지를 쉽게 떠올리기 어렵기도 하다. 하긴 헌법 자체에서도 정당한 사유 없이 자유권을 침해해선 아니 된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누가 감히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려 들겠는가? 법에 명시된 ‘~에 대한 자유’에 대해선 따로 리스트를 작성해야 될 정도이다. 이런 사회에선 감히 자유라는 가치에 대한 의심조차도 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아이러니 한 점은, 법적으로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 살고 있음에도 우리는 자유를 계속해서 추구하고 추앙하는 면모를 보인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든지,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든지,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든지 등... 자신이 현재 부자유스럽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는 ‘경제적 자유’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게 하나의 유행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죽을 때까지 평생 돈을 벌기 위한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큰 돈을 지니고 싶다는 것이다. 직장인들은 그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 지금의 노동이라는 부자유를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대한민국 헌법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직업에서 종사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법은 기업의 자유도 보장해주고 있다. 기업은 원하는 노동자를 채용할 자유가 있으며, 원치 않는 노동자는 채용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는 것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린다. 누구나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은 기업의 자유다? 모순되는 것 같지만 우리는 모두 이것에 수긍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나는 자유롭게 기업에 입사를 지원할 수 있지만, 기업이 자유롭게 나를 채용하지 않아도 혼자 그 결과에 수긍하고 우울해진 채로 다른 기업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다음의 기업에겐 간택받고자 자신이 원치않는 공부에 매진하고 원치않는 시험을 본다. 자유롭게 직업을 고르기 위해 부자유스러운 행위를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 사회에선 당연한 것으로 취급된다.
왜 그렇게 굳이 어려운 입사 절차를 거치느냐고 물으면 좋은 기업에서 많은 돈을 벌어 경제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라고들 대답한다. 이쯤 되면 과연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자유라는 것이 어떤 개념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처럼 각 개체가 행사하는 자유라는 가치는 양립하기 어려운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법은 우리에게 자유를 보장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제한하기도 하니 말이다. 당장 내가 누군가를 살해하는 행위를 저지른다면 나는 곧장 구속되고 교도소에 수감될 것이다. 그리고 법적 절차를 통해 정해진 형량의 기간 동안 모든 자유권이 박탈된 채 부자유스러운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자유민주주의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동의하는 체계이다. 정말로 나의 자유가 침해당하지 말아야 한다면, 내가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 역시도 나의 자유이지 않은가? 내가 내 자유를 행사했을 뿐인데 어찌해서 나는 자유권을 박탈당해야만 하는가?
사회는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의 살인으로 인해 한 생명이 죽었으며, 이것은 명백한 악행이기에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개념에서 살펴보면, 살해와 같은 위력 행위는 다른 사람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그러기에 내가 타인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제한한 만큼, 나의 자유권 또한 박탈될 수 있다. 즉 자신의 자유에 대해선 우린 모두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에 나는 내가 원하는 바가 있더라도 이것을 억누르는 선택을 하게 된다. 제아무리 화가 나고 살의가 치밀어도, 나는 내가 원하는 자유에 따르기보단 그 자유를 선택하지 않는 부자유를 선택하게 된다.
이처럼 법은 우리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한다. 우리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무작정 가게에 들어가 식재료를 먹을 순 없다. 돈이 없으면 생존에 필요한 것조차도 취할 수 없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있더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부자유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자신의 자유를 실현해낼 수 없다. 그것이 우리가 누리는 자유라는 존재이다.
그럼 우리는 왜 부자유를 감내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물리적 세계에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아무리 살고 싶다고 발버둥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지닌 인체라는 것은 참으로 성가시고 까탈스러운 존재이다. 대부분의 인체는 몇십 분 만이라도 산소가 유입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다. 수분은 약 1주, 영양분은 약 1달. 내가 싫다고 해도 인체는 수시로 먹고 마시고 숨을 쉬어야만 한다. 실제로 우리는 먹는 데에만 하루에도 몇 시간과 몇만 원씩의 돈을 소모하고 있다. 참으로 부자유스러운 존재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선 시간을 소모해야만 한다. 그 시간 동안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선 앞서 말한 유지보수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 과정에 시간을 소모한 만큼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이런 부자유의 과정을 거쳐 내가 생산해낸 무언가를, 어떤 사람이 아무런 노력과 시간도 들이지 않고 효용을 취해버리는 것을 우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에게도 자유롭게 생산물을 이용하고 싶다면 그 대가를 치르라는 규율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오늘날의 법이라는 시스템이 되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부자유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회에서 태어나 사회에서 자라게 된 이상, 개인은 어쩔 수 없이 부자유를 감내해야만 한다. 우리가 정규 교육과정을 배우고 사회화를 거치고 집단에 소속되고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하는 이유도 이것에 있다. 시스템의 일원이 된 이상 그 시스템에 의해 자유가 제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순리이다.
이 부자유가 싫다면 결국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시스템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벗어나 그 영향력이 닿지 않는, 동시에 다른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는 어딘가를 찾을 수밖에 없다.
오늘 날 지구 상에서 이것이 가능한 곳이라고는 아마 그 어떤 국가의 소속도 아닌 외딴 섬의 무인도만이 유일할 것이다. 그곳에선 다른 사람이 만든 시스템에 구속받지 않아도 되고, 룰을 만들어 지키며 살아갈 필요도 없다. 그저 혼자 무인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꾸려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물리적 필요, 즉 에너지 섭취라는 생명체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는 지속적으로 행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홀로 그 무인도에서 사냥과 채집을 통해 식량을 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마저도 싫다면 그저 죽음을 맞이하는 수밖에.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물리적 실체인 이상 부자유스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기에 우리는 매일을 부자유 속에서 보내며 자유를 추구한다. 어쩌면 우리 인류가 자유를 울부짖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진정한 자유를 이룰 수 없는 한계를 지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끔 다른 직장인들을 만나면 다들 농담처럼 얘기하는 것이 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이직 혹은 퇴사를 하게 되면, 프로필 사진이나 컴퓨터 메인화면을 자신이 이제 자유라는 사진으로 넣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회사의 노예라고 자조하고 사원증을 개목줄이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해보면, 많은 직장인들은 지금 자신의 상태가 부자유스럽다고 느끼는 것도 같다.
그들에게 있어 자유란 자신이 원하는 봉급, 작업환경, 동료, 직장문화 등이 마련된 더 좋은 직장으로 옮기는 것이다. 혹은 아예 직장인으로서 노동을 멈추는 휴식기를 갖는 것일지도. 아무튼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이루고 나면 과연 그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새로운 직장에 간다고 해도 노동은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을 리는 없다. 노동을 하지 않고 휴식기를 갖는다 할지라도 통장 잔고가 수십억원에 달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 돈을 벌어야만 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결국 우리는 부자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부자유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애석하지만 그러하다. 다만 부자유스럽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스스로의 인생을 노예의 삶으로 여기고 싶지는 않다. 이 부자유란 비단 인간뿐만이 아닌,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심지어 지구를 벗어나 우주의 진공을 떠도는 항성들조차도, 중력이라는 물리법칙에 예속되어 자신들의 정해진 경로를 계속해서 맴돌고 있다.
백만km가 넘는 크기를 지닌 태양도, 2m가 채 되지 않는 작디작은 나와 똑같이 부자유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나의 배가 넘는 수명 동안에도 태양은 그저 우리 은하를 맴돌며 핵융합 반응을 반복할 뿐이다. 그에 비하자면 춤추고 노래하고 사랑을 할 수 있는 나는 어떠한가? 그 찰나의 순간 동안에는 나는 자신을 부자유스럽게 속박하는 물리 법칙은 잊고 살아갈 수 있다.
더 부자유스러운 다른 존재와 비교하며 위안을 얻자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우주는 부자유가 당연시되는 우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우주에서 우리는 모래알 하나보다도 더 작은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부자유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자유의 연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부자유를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내가 어떤 직업을 갖든, 누구와 만나든, 어떤 물건을 사든,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났다. 무엇을 이루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부자유스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그 부자유 속에서도 우리는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혹자는 이 선택조차도 어쩔 수 없이 누리게 된 불가항력적 존재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우주는 그런 불가항력적 선택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을 기본 상태로 하는 체계이다. 선택이라는 예외조항은 우리 생명체만이 지닌 유일한 권리이며 유일한 자유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선택한 부자유로 인해 지금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앞으로의 인생도 계속해서 부자유를 선택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으로 인해 우리는 계속해서 무언가에 속박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친구, 연인, 가족, 직장, 돈, 지역, 시간 등...
그러한 속박이 싫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내던져버리고 떠나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사회도 다른 인간도 시스템도 없는 그 어딘가에 도달하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글쎄, 적어도 나 자신은 그러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얻은 자유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겠지만, 그런 자유는 그저 나를 세계로부터 고립시킬 뿐이다. 마치 중력궤도에서 벗어나 어딘지 모를 우주 끝으로 튕겨 나가는 행성처럼.
그러기에 나는 자신을 속박하는 부자유를 계속해서 짊어지고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 이 부자유는 계속해서 커져 나가겠지만, 나는 기꺼이 부자유스러운 나를 수용하겠다.
그 부자유 속에 주어지는 선택의 자유를 만끽하며, 육체의 틀에서 자유로워지는 그날까지.
"너흰 그렇게 자각하지 못한 채 자유를 잃고 이윽고 스스로를 속박하게 될 거야. "
"난 자유를 잃는 게 아니야. 앞으로 소중한 부자유를 손에 넣어 나가는 거야."
- SSSS.DYNAZENON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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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2017. Nathan McBride